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od job 조은 Mar 06.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퇴사 이유가 그거였을까?

퇴사하면서 알게 된 트라우마, 마음 편히 가지게 된 벤치타임



누군가는 퇴사를 하면 도망친 거라 하고 누군가는 퇴사를 하면 용기를 낸 거라 한다. 누구는 버티지 못한 선택이라 하고, 누구는 새로운 것을 선택한 거라 한다.



사실 모두 맞지 않나?


이 중 정답은 없는데 자꾸만 세상은 내게 정답과 해설을 요구한다.


인과관계라고는 하나도 없어보이는 저 말들이 각자 내 마음에 자리를 잡고서는 자기들끼리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했다. 아닌 건 아니라고 어설픈 배려나 선 넘은 참견에 선 그을 줄을 몰라서 모든 말을 듣고만 있었다. 사실 선 그을 줄을 몰랐던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몰랐던 것이다. 내 마음에 대해서 단 한 줄도 거짓을 쓴 적이 없는데 정답이 없다는 이유로 거짓인 것처럼 다뤄지는 상황들이 싫었지만, 하나의 정답을 콕 집으면 남은 건 모두 오답이 되는 세상의 이치에 응해주기는 더 싫었다.




그냥 3년 간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됐다.

인생은 1번부터 25번까지 다 풀고 나면 엎드려서 자도 되는 그런 시험이 아니네.  배팅운이 좋거나 머리든 손이든 뭐 하나가 빠르면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그런 게임도 아니네.  

어떤 때는 그렇게 푼 문제들이 다 맞아도 의아하고, 어떤 때는 그렇게 승리해도 기쁘지가 않더라.



누가 인생은 예술 작품과 같다고 했었나?


나는 그 말에 가장 동감했다. 완성된 걸 한발짝 떨어져서 보면 마냥 아름다운데 그 전까지는 인생이 내게 고통도 주고, 영감도 주고 그런다.


인생에는 정답도 해설도 없지만 어느 시점에 어떤 것이 완성되면 해석 정도는 할 수 있다. 이제서야 나는 3년의 사회생활을 마치고 완성된 작품 옆에다가 해석을 덧붙여 쓴다.





작년에 회사를 옮기기 전 군산을 가서 ’있잖아‘라는 노래를 들으며 매일 월명공원 조깅을 했다.

그 때 정말이지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있잖아” 라는 말.

어려운 말 시작하기 전에, 타이밍을 놓쳐버린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걸 참 쉽게 꺼내게 해주는 좋은 말인 것 같다. 말, 그 놈의 말이 뭐길래 자꾸 나를 휘두르고 하려다가도 못하게 되는 걸까.

마음 속의 말을 한다고 늘 시원한 건 아닌데 하지 못해서 늘 얹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말에 휘둘리다가 이리 저리 왔다갔다는 많이 했는데 여전히 제 자리인 내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던 나는 이제서야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안다.





있잖아


나는 회사에 다니는 게 정말 좋았다.

하는 일도 좋았다. 작년에는 회사도 부서도 동료도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더 좋았다.


그래서 좋은 것 70을 하기 위해 싫은 것 30을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티는 시간 동안 마치 한 편의 대서사시처럼 좋아하는 것을 만나는 시간이 더 선명해질 줄 알았는데 왜 버티는지 모르게 됐다. 마음 속이 더 흐릿해졌다.

‘이걸 버틸 만큼 그걸 좋아하는 게 맞아?’


버티는 시간은 좋아하는 것을 의심하는 시간이 되었고,

그 시간은 내게 모임에 나가서 이야기를 할 때 내가 좋아해주는 사람 곁에서 내 이야기를 하면서 쌓아가는 데에 시간을 쓰는 게 아니라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 보려고 그 사람에게 말을 하며 나를 증명하는 데에 시간을 쓰는 것만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어느 시점에는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좋아하는 거를 알아주거나 곁에 머물러주는 일도 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좋아하는 걸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이 들었다.



근데 어느 순간의 버티는 선택도 내가 한 거 아닌가?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가서 내 이야기를 하겠다는 마음도 내가 먹은 거 아닌가?


내가 특별한 줄 알았던 것 같다.

버틸 수 있을 줄 알았고 싫어하는 사람마저 나를 좋아하게 만들 수 있다는 마음이 있었던 거다. 나는 언제든 좋은 사람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선택에 책임지지 못했던 이유는 하나다. 내가 책임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버티는 방향으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방향으로 선택을 했어야 했고, 내 마음을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밖에 두지 말고 안에 뒀어야 했다. 나를 가장 좋은 환경에 두지 않는 것도 자기학대라고 했나, 나는 내가 선택하고 또 마음을 주고도 자꾸만 저 멀리 밖을 바라보는 일만 했다. 저런 것까지 내가 좋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저기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 나를 좋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저기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바닥나고 숨이 찼다.


누가 버티라고 했어?

누가 마음을 달라 했어?

설령 요구 받았어도 한마디면 무너져 버릴 선택이고 마음이었다.








퇴사하고 가장 많이 든 의문은 이거였다.


- 왜 그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부끄러웠을까?
- 왜 계속 나는 부족한 인간이라고 느꼈을까?
- 왜 그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사회생활을 하는 내내 부끄러움, 부족함과 같은 감정이 내내 따라다녔다. 이런 부끄러움과 부족함은 말을 하려다가도 꼭 쉬게 만들고 말과 행동의 차이를 만들었다. 나는 숨겨야 할 것을 숨길 줄을 모르고, 드러내야 할 것을 드러낼 줄을 몰랐다.


특히 사회생활 1년차까지는 과정은 숨기고 결과는 드러내고 싶었다. 과정은 언제나 부끄러운 것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이런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으면 했다. 왜 숨기고 싶었을까? 할거면 일등, 어중간하게 뭐를 할 바에는 꼴등을 하는 게 나았다. 좋은 결과가 되지 못한 것은 폐기하고, 없는 걸로 하고 그러고 싶었다. A나 A+를 못 맞을 바엔 F를 맞아서 누락되어 버려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생 때는 A+를 맞으려고 애썼는데 사회생활을 시작하니 A+는 애를 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내가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A+도 F도 맞지 못하니까 부족한 점만 보였다.

나는 특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나를 내가 수용해주지 못해서, 내가 스스로 나를 특별하다고 여긴 결과가 그거였다.


그렇게 내가 나를 숨기려 할수록 더 상처가 되고, 트라우마가 됐다. 내가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사람을 소중히 여겨주지 않는 상처는 생각보다 컸다. 내가 나에게 수용받지 못할 거라는 그 감각을 내내 휘감고 다녔다. 남의 말을 듣고 그걸로 나를 찔러대면서 내가 나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다.






화 좀 그만.


유독 화가 많은 사람이 있었다.

사람은 부끄러워서 화내고, 슬퍼지고 싶지 않아서 화내고, 휘둘리기 싫어서 화내고 그런다는데 이 사람은 왜 화를 내는 걸까?


나에게 화내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그 사람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나를 발견했다. 오늘도 화내려나, 저 사람이 화내게 하지 않으려면 내 일을 더 정신차리고 해야겠다. 그런데 그게 이상했다. 다른 건 눈치를 이렇게까지는 안 보면서 왜 나는 ‘화’라는 감정에 이렇게나 취약한 걸까. 되짚어 보다가 대학생 때 2년 만난 사람이 ‘너는 왜 화낼 줄을 몰라’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화가 안 나서 안 낸 게 아니다. 화를 낼 줄도 모르고 화를 받아들일 줄도 몰랐다. 두렵고 무서웠다. 누가 화내면 ‘내 잘못인가보다’ 일단 사과하고 내가 화나면 일단 눌러뒀다.

혼자 화에 대해 더 생각해 보다가 하나를 알았다. 나는 혼나는 게 무서운 거였어. 나는 근데 나한테도 혼날까봐 무서워.


작년 일기장을 펼쳐 봤는데 [내가 능력이 없어지고 회사를 안 다니면 누가 나를 가장 먼저 외면할까?]라는 질문에 [그건 아마 나일 것 같아]라고 써둔 걸 봤다.

그래서 내가 나를 똑바로 봐주지를 못했다. 무엇을 보고 있고,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사는건지 나에게 진심으로 화내봤다.


하나 더 알았다. 나는 화내거나 혼나는 게 무서웠던 게 아니라 안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싫었던거다. 부끄러운 거 안 좋은 거, 슬픈 거 안 좋은 거, 휘둘리는 거 안 좋은 거. 근데 그거 안 좋은 거 맞아? 내가 안 좋은 거라고 외면하고 피하는 거 아니고?


왜 계속 같은 관계의 고통이나 패턴이 생길까?

돌려 돌려 말하거나 현학적인 말만 남길 때가 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내가 아는 걸로 세상을 이해하고 싶어서 그렇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모르는 걸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마음이 사람을 느끼하고 추하게 만들었다.


취직을 하고 나서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가 넘쳤던 것 같다. 그 곳엔 좋은 사람이 많다고 느꼈기 때문인 것도 같다.

받은 만큼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모든 건 내가 선택했다는 감각에 책임지고 싶었다. 그게 나에 대한 나의 가장 큰 오해였다.

결국 그 회사를 그만둔 이유를 이제서야 솔직하게 말한다면 내가 사랑을 주고 싶었던 것과 내가 선택했던 것들 때문이다.


돌려 돌려 말하거나 현학적인 말을 빼고 말하자면 친구이자 동료이자 내가 좋아했던 사람과의 일 때문이다.

워크숍 날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친구여서 조심스럽고 회사에서 만난 사람이라 불편했다. 내가 이 일들을 어떤 마음으로 선택하고 버티고 있는데 그렇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해?


나도 하고 싶던 말 있다.

너가 그걸 하고 싶다고 했다니까, 내가 이것저것 하고 싶다는 말을 들으면 힘이 빠진다고 했나 그런 말을 뒤에서 했다니까 지금은 안하고 버티겠다고 한건데 나도 그런 말을 여기서 해도 될까. 또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너가 안 되는 게 내 탓 같지? 나도 너랑 똑같이 말해도 될까. 나는 너가 나에게 그렇게 욕한 누구가 직접 경험해보니 나에게 더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내 뒤에서는 다른 말 하고 앞에서는 이러는 너를 보니 이제 조언이나 공감 같이 느껴지는 게 아니라 조롱이나 합리화 같아서 불편하다고 말해도 될까. 내가 소중히 생각해서 선택한 일에 대해서 이런 일은 의미 없다고 술 먹고  쉽게 무력화 시키는 너를 내가 아직도 좋아하는 게 맞을까. 너를 좋아해서, 좋아한다는 이유로 너를 위한다는 말로 뱉은 말이 많아 반박해도 웃긴 사람될 거 아니까 공격하는 건가. 아니면 부끄러워서 이러는 건가. 약해서 이러는 건가 약아서 이러는 건가, 아니면 내가 약하거나 약은건가. 이것도 나만의 생각인가. 그래서 그날 밤 내내 나와 이 사람을 의심했고, 그날 밤이 지난 이후로는 내내 분노가 생겼고 이후에는 불신이 됐다.

사실확인을 해보려는 의지로 시도했던 것들조차 무응답이 답인 걸 보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너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 맞니?

나는 이제 다르게 지내고 싶어서 여기에 왔는데 정작 내가 믿으려던 사람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그렇게 지내지 않았던 순간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무엇을 끊어내야 할지가 보였다.


나는 왜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까.

왜 그 사람을 봐줬을까. 나는 왜 이 사람이 마음 상해하면 달래주고 미안하다고 했을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으면서 왜 이해하려고 했을까, 맨날 술이나 먹고 뒤에서 이걸 하고 싶다면서 자기 주변 사람을 우습게 만들고 하소연 하면서 자기 가치를 올리는 그런 사람의 편을 왜 들어줬을까. 이제까지 그런 나를 이해 받고싶어서 내가 그렇게 살고자 해서 네 곁에 머물렀구나.

나는 여전히 오만하고, 사랑을 받고 싶고, 약은 것에 같은 것에 분노가 일어나고, 관계와 기회를 쉽게 보는 면이 있구나.


그렇게 살기 싫다.

살던 길로 걸어왔는데 너가 내 길이라니. 바람의 방향이 잘못됐다. 역풍에게 등을 돌리라는 말이 생각났다. 이런 알아차림이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이렇게 했는데 넌 왜 그래? 같은 원망도 아니다.

나는 이제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으니 끌려들어가거나 휘둘리지 않을거야 라는 스스로의 인생에 하나 새기는 각인이다.




작년 어느 날의 일기



결론 : 퇴사 이유 [공부]


그런 일이 있고나서도 퇴사를 결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퇴사 이유를 묻는 대표님의 말에 [공부]라는 말을 꺼냈다. 그럼에도 내 말에는 단 한 치의 거짓말도 없었다.


뭐를 눈치채신 건지는 몰라도 “관계의 문제라면 해결해줄테니 말해봐요” 라는 말에도 “공부 맞아요” 라고 답했다. 물어봐줘서 감사했고, 그 와중에 이제는 마음이 왔다갔다 휘둘리지 않는 나를 이 질문으로 발견하게 해줘서 더 감사했다.


엄마와 이 일을 아는 몇몇 친구가 물었다.

왜 대표님께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어?


그러면 내가 이제까지 그 사람을 이해해보고, 편 들어주고 그 사람 이야기를 들어주고, 친구라서 본 그 사람 모습을 다 저버리는 거잖아. 괜찮아 걔는 갈 곳도 없어. 그렇게 욕해도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게 소중한 척 고민하지만 매번 자기가 가진 걸 욕하기만 해. 그렇게 욕할거면 차라리 자기가 하거나 떠나지 왜 못 그런대? 일단 지금은 자기 바람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 하나 날려버리자고 솔직해질 필요가 없었어. 라고 엄마에게 답하며, 그제서야 나는 내 상처와 트라우마들을 봐줄 수가 있었다.


이전까지는 내 약한 것을 보며 그런 게 없다며 숨기고 이제까지의 길을 돌아보지 않은 채 다른 길을 선택했는데 나는 같은 길을 선택하면서도 나를 다 수용해주는 결정을 드디어 해낼 수 있었다.


부끄러우면 숨기고, 슬퍼지면 울고 휘둘릴 땐 휘둘려도 돼. 그러고나서 꺼내고, 웃고, 꼿꼿해져.






안녕


‘안녕’ 이라는 인삿말, 쓰임새와 의미를 살펴보면 힘껏 닫혀 있으면서도 한껏 열려있다. 그러고보면 안녕하세요? 라는 말, ‘편안히 잘 지내시나요?’ 라는 뜻이기도 하고 물음표로 끝나는데도 아무도 답 안해준다.

네 안녕하세요로 답한다.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다.


결국 트라우마를 깨닫고 퇴사를 한 후에 내 마음에 또 생긴 의문은 다음과 같았다.


- 나는 좋은 걸 보여주기 위한 인생을 살아왔던 건가?
- 왜 완벽하지 않을 바에는 포기하고, 나태해지는 모습이 보일까?


한편으로 늘 그렇게 산 것도 아닐텐데 왜 저런 순간에만 집중하는가, 그러니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졸업을 하기 전에 취직을 한 적이 있었다.

이제까지 공부한 것과도 전혀 관련 없고, 다른 지역에 가서 살아야 하는 시기가 생겼는데도 내가 무언가에 도전한다는 그 기분이 좋았다. 혼자 다른 지역에서 가족도 친구도 없이 살아야만 했다. 그때 알고 있던 걸 지금 다시 알게 된다.


내가 알게 모르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살고 있었구나. 철저히 혼자가 되어보면서 진짜 일을 하니 내가 보여주는 데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지 알겠다.


어느 순간에는 간섭하지 말라고 관심 가지지 말라고 하며 외로움이나 괴로움을 선택한 게 얼마나 큰 오만인지, 내가 얼마나 오만하게 사랑을 받아왔던 인간인지 뼈저리게 느낀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나는 사랑을 받을 만해서 받은 게 아니라 운이 좋게 받아왔던 거구나. 나는 해놓은 게 아무 것도 없구나.

신입사원 때 무언가 모르겠고, 마치지 못하겠는 게 있으면 차라리 밤을 새서라도 내가 해낼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 땐 나는 다 해낼 수 있어 라는 자신감과 함께 근데 시간이 많다고 내가 할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심의 원류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던 못하겠어가 아니라 누군가 나에게 그런 시간과 기회를 줬는데 내가 그 사람을 만족 시킬 수 있겠어? 였다. 내가 아닌 ‘상대’가 생기면 나는 항상 반대편의 마음들이 각각 나를 잡아당겨 마음 속이 팽팽해지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남이 나에게 해줬으면 하던 거 나는 나한테 해줬나? 내가 나에게 기회를 준 적이 있나?


어떤 사람의 말이 내 마음이 들어오면 내 마음에 공간을 만든다는 이유로 나를 밀어내기 바빴지 나를 들여줄 생각은 한 적은 없었다. 밖에 세워두고 완벽하지 않으면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걸어 잠궜다.

나를 초라하게 만든 게 나였다.





나는 일잘러 아니고 일좋러예요


나는 사실 일을 잘하고 싶은 게 아니다. 일을 좋아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잘하든 못하든 어떤 일을 좋아하니까 그걸 그냥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걸 하려면 잘해야 하니까 잘하고 싶었던 거 뿐이다.


그런데 그냥 과학을 할 수는 있어도 직업 과학자가 되려면 20대를 전부 대학원에만 바쳐야 한다. 좋아한다는 건 야속하게도 그런 거다. 다시 생각해본다. 나는 무언가를 위해 20대를 내어줄 만큼 좋아하나?

대답해보자면, 아무 의문 없이 “그렇다” 라는 대답을 꺼낸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는건지 아닌지 오랜 시간을 마음에 휘둘렸다.


교육학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이 “교육을 한다는 건 저 사람을 바꾸기 위해 내가 바뀌어야 하는 거예요” 라는 말을 해주신 게 기억이 났다. 어제는 서점지기님이랑 이야기 하는데 “아끼는 사람에게는 심리학 하라고 하기가 어려워요. 심리학을 배운다는 건 당장 남의 마음을 보고 상담하는 걸 선택하는 게 아니라 무덤을 만들어 둔 내 마음을 헤집어 버리는 걸 선택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좋다고 대답했다. 누군가를 바꾸기 위해 평생 내가 바뀔 수 있다는 게, 누군가를 보고 또 이야기 하기 위해 나를 똑바로 보고 이야기하는 게 내 일이 된다면 나는 거기에는 책임질 수 있다.




그래서 나의 퇴사 사유는 ‘공부’다.


남 탓할 바에는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걸 하는 게 낫다. 어느 날 그 생각이 들었다. 봐야 하는 걸 안 보고 여기 서 있으니까 무언가가 내게 오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여기가 내 무덤이고, 내 무덤을 덮어줄 흙과 사람들이 오고 있었다. 세상에, 나는 알고리즘보다도 나를 모르고 세샹을 모르는데 이렇게 끝낼 순 없어. 똑똑해지고, 학위를 따고 이런 게 아니라 아직 나와 세상이 너무 궁금하다.


내 발로 어디든 걸어가서 내게 오는 걸 제대로 볼거다.​




벤치타임을 잘 보내면,




누구나 아는 배구선수 김연경은 어릴 때는 키가 작아 긴 벤치타임을 보냈다고 한다. 선수에게 있어 벤치타임은 나의 쓸모 없음을 확인하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런데 김연경 선수는 그 긴 벤치타임에서 감독이나 코치처럼 경기를 보면서 공부했고, 나중에는 경기의 흐름과 경기장의 생리를 너무 잘 아는 선수가 되었다고 한다.

단지 키가 크고 벤치에서 일어날 때가 되니 자기가 알게된 것과 가지게 된 것을 잘 썼을 뿐이다.


경기장의 벤치 뿐만이 아니다.

공원 벤치 역시 앉을 때가 아니라 생각이나 휴식을 마치고 일어설 때가 최고의 순간이 될 수 있게 설계된 구조물이라고 한다.


앉든 일어서서 어디를 가든 세상은 나를 죽이기 위해 설계된 게 아니라 잘 살아가게 설계가 되어 있다. 그걸 나에게 맞게 커스텀 하는 게 인생이 아닌가 싶다.

사실 앞에서 ”나에게 인생은 예술 작품이다“ 라고 한 사람은 내가 존경하는 유네스코의 한 전문관님이다.

“일을 예술처럼 하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질문을 한참은 어린 나에게 했다.


여전히 모르겠지만 예술이 되려면 그냥 내가 되면 되는 거 아닐까? 그러면 세상에 하나 뿐이니 예술은 맞는 것 같다. 세상이 그 가치를 알아주면 작품까지 되는 거고, 아니어도 예술이다. 가끔은 빈 도화지를 보며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조차 감이 안 잡힐 때도 있지만 획을 그리는 법을 배운다면, 세상에 있는 어떤 재료나 도구를 배운다면, 그걸 내가 쓴다면 완성할 수 있다.


여기까지 의문이 없다.





알고 있던 걸 하자. 세상에 더 좋을 게 있을 것 같아 내 밖을 보고, 내가 나에게 머물러주지 않던 순간을 지나 이제는 내가 나에게 머물러 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