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제의 관점에서 본 체인소맨: 레제편 후기

by 주리비

글에 앞서, 체인소맨: 레제편의 300만 관객 돌파를 축하드리며 혹여나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두 번째 감상을 마치며


앞서 영화를 처음 본 이후 약 3주 만에 다시 영화관을 찾았다. 평소 관심 있거나 인상 깊게 본 것은 다시 보는 것을 좋아하기에, 이번 관람은 조금 특별하게 레제의 심경변화에 맞춰 관람해 보자는 개인적인 목표를 세우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체인소맨의 시대 배경


먼저 체인소맨은 1997~1999년 사이의 시대배경을 가지고 있다.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다들 아는 사실이겠지만 영화의 주인공 '레제'는 소련의 인간병기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소련의 붕괴는 1991년이므로 역사적으로는 약 6년 정도의 시차를 가지고 있다.





영화의 감상


2회 차를 보며 1회 차보다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보다 여운은 무뎌졌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레제의 시선에서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행동을 이어갔을지 보는 재미가 있었다.


레제는 냉전 시기 체인소의 심장을 가져가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비밀리에 일본에 파견된 인간병기이다. 소련에서 훈련을 받았고 시간이 흐른 상황이니, 겉보기와 다르게 나이도 덴지보다 많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로 인해 임무를 내린 주체가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방황하던 시기를 겪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굳이 카페 알바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이유도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목표인 덴지를 확인하고 죽이려는 순간, 대상이 과거 자신과 같은 나이대의 소년인 것을 확인하고 더 망설였을 것이다. 어차피 임무를 완수해도 돌아갈 곳은 없는 데다(러시아로 돌아가면 어떻게든 되긴 할 것이다.) 냉전 상황은 지속 중이며, 당장 눈앞의 소년에게 과거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을 테니까. 그러나 덴지는 그런 그녀의 속을 알 턱이 없다. 덴지가 건넨 하얀 거베라를 기점으로 혼란스럽던 레제의 내면은 날씨가 맑게 개인 것처럼 호기심(호감)으로 바뀌었을 것 같다.


레제는 카페에서부터 줄곧 덴지의 상태에 대해 걱정한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느니 하는 레제의 말은 그녀가 봐온 아이들과 다른 덴지의 상황을 걱정하는 말로 들리면서도 공안이라는 직업을 가진 덴지가 자신과 함께 도망쳤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 있는 대사라고 느껴졌다.


덴지와 학교를 탐험하는 레제


그렇다면 왜 학교일까? 사실 레제도 학교에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덴지에게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을 운운하며 같이 밤에 학교를 탐험하자며 속삭인다. 학교는 레제와 덴지의 또래들이 다니는 지극히 평범한 공간이다. 시골쥐가 좋은 레제는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는 소년과 자신의 또래들이 누리는 평범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고 싶은 마음에 학교로 향했을 거라 생각한다. 또한 학교는 도시와 분리된 공간으로, 도시에서 도망치고 싶은 레제의 마음을 대변하는 공간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그렇게 도망친 공간에서 레제는 덴지와 함께 평범함을 연기하며 시간을 보낸다. (밤이라는 시간대는 학교가 비어있는 시간이므로 그들이 진짜 평범함을 느낄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대변한다) 그러던 중 레제는 덴지를 수영장으로 이끌고 그곳에서 덴지를 자신에게 빠지게 만들기 위한 회심의 일격(나체수영)을 날린다. 덴지가 (짧은) 고뇌 끝에 나체로 수영장에 뛰어드는 장면을 보며, 마치 소년과 소녀가 태초로 돌아가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장면과 함께 중간중간 나오는 거미와 나비는 덴지가 레제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나는 오히려 레제 또한 덴지에 대한 마음에 확신이 생긴 것을 보여주는 장치로 느꼈다.


수영 후 레제는 자신의 마음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서로의 마음이 같은지 확인하기 위해 쏟아지는 비를 보며 덴지의 마음을 묻는다. 그러나 덴지는 도시쥐가 좋다고 대답하고 레제는 덴지와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리고 레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 평화로운 공간에서 레제의 평화가 깨지는 순간. 괴한의 입에서 체인소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순간. 레제는 표정관리에 실패하고 만다. 덴지가 휘말릴까 봐 일부러 옥상으로 피신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웃음 가득했던 자신의 표정이 적응되지 않는 듯(또는 덴지와 자신의 마음이 다른 것을 확인하고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듯) 화장실에서 자신의 얼굴을 살피며 볼을 매만지던 소녀는 체인소라는 단어를 트리거로 다시 자신의 임무를 자각하고 인간병기로 변하게 된다. (윈터솔저의 버키의 암시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괴한(킬러)을 제압한 레제


이후 순식간에 괴한을 제압하고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오마주와 같은 장면이 나오면서 레제는 '제인은 교회에서 잠들었다'를 부른다. 노래의 가사는 러시아어로, 제인이 평범한 데이트를 즐기고 교회에서 잠에 드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레제의 심정을 대변하는 가사로 덴지와 평화로운 데이트를 즐기던 도중 난입한 괴한에 대한 분노를 차분하게 풀어낸 것으로 보였다. 레제는 이 과정에서 눈을 깜빡이지 않은 채 비를 맞으며 괴한을 살해한다. 여기서 레제가 눈을 부릅뜬 것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었는데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우선, 레제는 인간병기이다. 작중 레제가 흘리는 눈물은 덴지 때문에 웃다가 나오는 눈물뿐이다. 그만큼 레제는 철저히 병기로써 훈련당했으며 감정 통제에 능숙하고 슬픔과 고통에 대한 역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레제의 눈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학교에서의 평화로운 순간이 깨지는 것에 대한 그녀의 울고 싶은 심정을 대변한 것으로 보였다.


화장실에 가기 전, 덴지와 자신의 이상향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레제는 괴한의 습격을 겪으며 결국 자신은 인간병기일 뿐임을 자각했을 테지만 그럼에도 덴지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덴지에 대한 마음이 없었다면 바로 덴지를 찾아가 살해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레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다음 날 덴지와 함께 축제에 갔다. 만약 괴한의 습격이 없었다면 축제에서 덴지의 심장을 노리는 미래와는 다른 미래가 그려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레제의 마지막 결심은 축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덴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덴지에게 도망치자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덴지의 마음속에 다른 여자가 있는 것을 눈치챈 레제는 그때까지도 덴지를 포기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이때 레제가 언급한 공안도 찾지 못하는 곳은 러시아이며 자신의 조국으로 가면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체인소의 심장은 물론이고 덴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다만 데려가는 방법이 폭력적이었을 뿐, 어차피 악마는 되살려낼 수 있으니 함께 도망친다에서 강제로 데리고 간다로 목적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후 전투가 이어지며 퇴마 2과를 습격했을 때 노모(퇴마 2과의 데블 헌터)의 언급으로 보아 레제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임무를 수행하며 공안들과 마주쳤을 가능성이 높으며 노모는 그것을 기억해 낸 것으로 추측된다.


레제는 체인소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체인소의 심장덴지를 모두 데리고 가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쉽사리 그를 제압하지 못하고 결국 시간을 끌다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덴지에 의해 살아났지만 덴지가 마키마에게 조련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이상 덴지와 자신은 도망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덴지에게 굳이 자신의 행동이 모두 연기였다고 말하며 그에게 정을 떼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레제는 인간병기리기 때문에 이 순간까지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그간 했던 행동은 모두 거짓일 가능성 또한 있다. 이 경우 빨간 거베라가 레제가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신을 준 장치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덴지는 여전히 레제가 좋다고 말한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천진난만한 소년에게 더 똑똑해질 필요가 있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레제는 덴지의 삶에서 떠난다.


레제는 그 카페에 가려고 했어..


그러나 레제는 도망칠 기회가 있었음에도 다시 덴지에게로 향한다. 비록 그 끝이 죽음일지라도. 영화의 초반 Iris out의 뮤직비디오에서는 마키마의 눈이 정말 많이 나온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항상 덴지(포치타)가 있다. 레제가 마키마의 감시를 인지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마키마와 덴지의 관계를 인지한 이후부터는 매 순간 마키마의 간섭을 각오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덴지 역시 공안에 소속된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고 일에 대한 애착도 생겼다.


그럼에도 덴지가 레제를 만나기 위해 공안에 소속되어 살해당할 수 있음에도 돈을 챙겨 꽃다발까지 사들고 간 모습과 인간병기인 레제가 명령과 리스크를 무시한 채 자신의 의지로 덴지에게 가는 모습이 겹쳐 보이며 마지막 순간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마키마라는 거대한 힘 앞에 굴복하는 것을 보며 나는 또 한 번 저항할 수 없는 무력감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가는 길은 마치 그 위에 마키마에 의해 깨져버린 그들의 사랑이 파편 쳐 럼 흩뿌려져 있는 것 같았다. 그 파편을 밟으며 씁쓸함을 느끼며 걸어 나온 내게 남은 것은 공허함과 8주차 특전 포스터뿐이었다.




마치며


체인소맨: 레제편은 주로 판타지나 액션 영화를 좋아하던 내게 애니메이션의 즐거움을 알려준 영화라고 생각한다. 작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 영화에 삽입된 음악, 연출 기법이 꽤 마음에 들었고 여러번 봐도 새로운 해석이 나오는 것이 재밌었다. 이렇게 여운이 길게 남았던 영화는 '빅피쉬'와 '인터스텔라' 이후 오랜만이라 더 좋았던 것 같다. 이 영화를 계기로 새로운 애니메이션에 입문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언젠가 또 다른 후기를 들고 올 것을 기약하며 체인소맨: 레제편의 후기를 마친다.


5주차 주말 현장 이벤트로 배포되었던 영화 포스터(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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