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준비, 결혼식, 가족 여행, 출장으로 이어진 큼직한 일정이 끝났다. 네덜란드에 어느 작은 마을 호텔에서 푹신한 킹사이즈에서 기절한 것처럼 혼자서 실컷 잠을 잤다. 일어나보니 오전 10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그래도 일어나기 싫어서 침대에서 비비적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리할 때가 됐는데 생리를 안하네 싶었다. 매달 일정한 날에 꼬박꼬박 해오던 생리였는데 일주일이 늦었다. 피곤해서 일주일 늦나보네 하고 지나칠려다가, 설마 싶어서 테스트나 해보기로 했다. 곧 영국 여행도 갈건데 임신 아닌 걸 확실히 하고 가는게 마음 편할 것 같아서였다.
편한 복장으로 호텔 앞 편의점에 덜렁덜렁 걸어갔다. 의약품이 모여 있는 곳에서 한참을 들여다 보았지만 영어는 단 한 단어도 찾아볼 수가 없다. 죄다 네덜란드로만 설명이 적혀 있다. 대충 포장지에 있는 설명을 보니 임신테스트기인것 같아서 집었다. 그런데 가격이 사악하다. 27유로나 된다! 잠시 망설였다. 어차피 임신 아닐건데 괜히 27유로만 버리는거 아니야? 그래도 확실히 해두고 영국에서 편하게 놀러 다니고 싶어서 보험 차원에서 샀다. 호텔에서 주는 치약도 영 맛이 이상하길래 치약도 하나 같이 샀다.
호텔방에 들어와서 임신테스트를 했다. 예상한대로 역시 한줄이었다.
그럼 그렇지, 임신일리가 없어, 하면서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며 밖에 나가서 시내 구경이나 할까 싶어서 외출할 채비를 서둘렀다. 콧노래를 부르며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새로 사온 치약을 짜서 양치를 하려고 입에 물었는데, 순간 우웩 했다. 찐득찐득한 핑크 물질이 잇몸에 다 달라 붙었다. 퉤퉤 겨우 뱉고는 이 동네는 치약이 왜 이 모양인가 싶어 인상을 팍 썼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건 치약이 아니라 틀니접착제였다!) 그러고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거울을 보면서 느긋하게 공들여 화장을 했다.
그러다 화장실 한쪽 선반에 무심코 둔 테스터기에 괜히 눈길이 갔다. 쓰레기통에 버려야지 하고 집어 들었다가 슬쩍 봤는데 두 줄(임신)이 되어 있는 거다. 아까 분명히 한 줄이었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내 눈이 잘못 된건지 모르겠는데 정말 연하게 두 줄로 보인다. 샤워한다고 뜨거운 수증기가 많아서 이게 두 줄 된거 아냐?
누구한테 물어보면 좋겠는데 내 나이 이제 스물일곱이라 주변에 아무도 임신한 사람이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대학 동기 언니가 몇달전에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급하게 카톡으로 언니를 호출했다.
“언니! 잘 지내지? 근데 물어볼 게 있는데 내가 테스터기를 했는데 첨에는 한 줄이었거든. 그런데 한참 있다보니까 연하게 두 줄로 바껴 있는데, 이거 임신 아니지?”
그런데 언니 대답은 단호했다.
“내 경험상 진하든 연하든 두 줄이면 임신 맞아. 아마 임신 맞을껄! 축하해!”
뭐, 임신이라고? 임신이 이렇게 쉽게 될 수 있는건가? 너무 갑작스러웠다.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하지? 영국 여행은 가도 되는건가? 그렇다고 지금 와서 비행기표를 바꿀 수도 없고, 호텔을 다 취소할 수도 없는데. 일단 이 사태의 공동책임자인 남편에게 급히 전화를 했다.
“근데 자기야, 놀라지 마. 나 임신한 것 같아.”
“뭐? 임신?”
“확실하게는 모르겠고, 다시 테스트 해 봐야 겠지만 희미하게라도 두 줄 나오면 거의 임신 맞대.”
“헐, 그럴 리가 없는데… 임신일리가 없어. 임신 아닐거야.”
“야! 임신은 나혼자 하냐? 애아빠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진짜 그딴 소리밖에 못해? 일단 전화 끊어!”
전화를 끊고 나니, 애아빠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 반응에 여간 실망이 아니었다. 그런데 또 달리 생각하면 나도 심란한데 본인도 얼마나 심란하겠나 싶었다. 불현듯 몇달전에 지나가던 동네 아줌마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애 아예 안 낳을 거면 몰라도 낳을 거면 바로 갖는게 좋아. 막상 나중에 갖고 싶어도 안 들어서기도 하고, 키울려면 체력도 딸리니깐, 괜히 피임하지 말고 바로 가져요.” 그때 우리 둘은 “이쁜 애기 생기면 당연히 낳아야죠!”하고 남의 이야기하듯 천진난만하게 웃었었다.
남녀가 사랑하면 아기가 생기는건 고대불변의 진리인데, 막상 실제로 나한테 닥치니 만감이 교차했다. 이렇게 바로 임신이 될 거라곤 진짜 상상도 못했다. 그 강행군 일정 속에서도 임신이 될 수 있다는게 믿기지가 않았다. 정말 임신을 하긴 한걸까? 임신을 했든 안했든 간에 어쨌든 네덜란드까지 왔는데 이 화창한 봄날에 호텔 방안에 틀어박혀 이렇게 하루를 날려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근처에 사는 직장 동료 마크(호주 사람)에게 연락했더니, 흔쾌히 자기 집에 놀러오란다. 덜레덜레 집에 갔더니 주말이라 아이셋하고 집안이 북적북적하다. 첫째, 둘째는 중, 고등학생이라, 하나는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러 나갔고, 하나는 인사만 하고는 제 방에 틀어박혀 있다. 막내는 아직 초등학생이라 그런지 마크에게 들러 붙어 있다. 그래도 나이에 비해 행동이 조금은 어색하다고 생각했는데, 마크가 “얘는 장애가 있는 아이라, 아직 손이 많이 간다”고 털어놓았다. 그 말을 하는 마크 얼굴에 그늘이 졌다. “애엄마하고는 이혼했고, 나 혼자 아이 셋을 키우는데, 쉽지 않아. 내 월급으로 생활이 빠듯하지.”라는 말을 덧붙였다.
꽤나 무거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분위기가 괜히 머쓱해졌다. 조금 있으니 장애아 돌보미 아주머니가 오셔서 막내를 맡기고, 마크와 나는 밖으로 나갔다. 그제서야 마크는 내가 알던 여유 있고, 웃음 많던 직장 동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근처 카페에 단둘이 앉아서 간단히 저녁을 먹기로 했다.
“마크, 아닐 수도 있는데, 아직 확실히는 모르는데, 근데 나 임신했을 수도 있다?”
“와우, 정말? 축하해!”
“아닐 수도 있어. 아직 아무한테도 얘기 안했거든.”
“우와, 그럼 내가 제일 처음으로 이 소식을 들은거야? 굉장한 영광인데!”
마크는 한껏 상기된 얼굴로 아이가 얼마나 이쁘고, 삶이 풍요로워지는지에 대해서 한참동안 말을 했다. 그 내용은 하나도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상기된 얼굴만큼이나 아까 그늘진 얼굴로 한숨 쉬던 얼굴이 대조되었다. 도대체 뭐가 진실일까? 내가 만약 임신이라면 내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는걸까? 불안감이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