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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리 Jan 07. 2024

우리가 알던 프랑스는 없다

아파도 치료를 못 받는다

오랜만에 남편의 외삼촌, 외숙모 내외를 뵈었다. 새해 연휴를 맞아서 잠시 딸집에 다녀가시는 길이었다. 외사촌 집은 우리 집에서 거리도 가깝고, 둘다 아이들을 키우는 처지다 보니 서로 왕래가 잦은 편이다. 


"너희도 이제 다시 한국으로 가야하지 않겠니?"


우리가 불평 불만을 한 것도 아닌데 외숙모가 먼저 말을 꺼내셨다. 외숙모가 며칠전에 고열로 몸살을 앓고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는데 운좋게 겨우 딸집 근처에 있는 의사가 환자로 받아주었단다. 항생제 처방을 받아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갔는데 약사가 하는 말이 "운이 좋으시네요! 이게 마지막 항생제거든요. 이거 드리고 나면 다음 환자부터는 항생제 처방전 있어도 이제 못 드려요."라고 했단다. 외숙모는 43년을 간호사로 근무했던 의료계 종사자로서, 이게 무슨 나라냐며, 아프리카만도 못하다고 열변을 토했다.


95세 노모를 돌보는 63세 우리 시어머니도 오늘 노모 증상이 뇌출혈이 의심되어 급히 119를 불렀으나 119 왈, 출동 못한단다. 지금 인력이 부족하고, 병원에 자리도 없다고, 환자가 의식이 있는 상황이면 긴급 상황이 아니니 집에서 알아서 더 돌보라고 했단다. 한국 사람한테는 이게 말이 되나 싶은상황인데, 여기 모인 프랑스 가족들은 다들 그런갑네, 어쩔 수 없지, 하는 반응이었다. 나는 가끔 분노해야 할 상황에 분노하지 않고, 끄덕하며 수긍하는 반응이 더 기가 막힌다.


나도 우리 아이들을 받아주는 의사가 없어 필수백신을 못 맞고 있어 걱정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큰애, 둘째애는 한국에서 어느 정도 키우고 와서 백신은 빠짐없이 다 맞췄다. 셋째는 프랑스에 도착하고 딱 한번 백신을 맞고 그 이후로는 못 맞고 있다. 그 한번도 운이 좋았다. 잠시 실습 나온 의대 실습생이 우리를 받아줘서 겨우 백신을 맞고 그 이후로는 못 맞고 있다. 의사가 없어서 그렇다. 나는 안아키(약 안쓰고 아이 키우기) 회원도 아닌데 프랑스에 와서 강제적으로 안아키로 아이를 키우고 있다. 의사도 없고 약도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기초적인 약으로 감기, 기침, 고열을 임기응변하며 오늘 하루 무탈하기를 기도할 뿐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프랑스에 온지 얼마 안되서 시스템이 익숙치 않아서 병원에서 아직 안 받아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도착한지 이제 1년반이 훌쩍 넘었다. 남편은 지금까지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거의 모든 병원 의사에게 우리 식구 5명을 환자로 받아 달라며, 정 어려우면 아이들만이라도 받아 달라고 전화를 하고 이메일을 보내고 애원복달했으나 "새로운 환자를 받지 않는다"는 매몰찬 답변만 받았다. 


주변에 아는 모든 프랑스 사람에게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봤다. 수십명은 물어봤을거다. 그런데 의사가 안 받아주면 방법이 없단다. 더군다나 "나도 의사가 없어."라고 하는 프랑스 사람들도 너무 많았다. 원래 담당하던 의사가 퇴직을 해서 그렇단다. 퇴직을 하고, 다른 담당 의사가 배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끝이란다. 타도시에서 이사온 사람들도 우리처럼 의사가 없다고 했다. 그냥 의료 시스템 자체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이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그러면 아프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그냥 집에서 쉬면서 스스로 나을 때까지 기다린단다. 으음음, 한국인인 나는 정말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영국 여왕이 일반 시민들에게 했다는 Keep calm and carry on이 이런 뜻이었구나. 아파도 알아서 견디시고 용케 살았다면 계속 일하십시오. 진정한 각자도생이 여기 있었다.


우리 남편은 자기 어릴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고, 주치의한테 아프다고 전화하면, 의사가 오전에는 집에 왕진을 오고, 오후에는 병원에 있어서 예약 필요 없이 그냥 바로 가서 치료 받고 약 받아 먹으면 되었다고 했다. 본인이 커서 타도시에 가서 직장 생활할 때만 해도 새로운 주소지에 의사 배정 받고 병원 가고 했단다. 10년만에 이렇게까지 의료 시스템이 망가진줄 몰랐다며, 애 셋을 키우는 아빠로서 매일 불안해하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한국도 여러가지 문제가 많이 있다. 끝도 없는 소모적인 경쟁과 숨막히는 SNS 비교 문화, 돈이면 굽신하는 천민자본주의, 외모지상주의, 아파트 층간 소음 분쟁, 중국의 미세먼지, 일본 방사능 위험, 북한 전쟁 위험, 부동산, 과도한 노동시간, 군대 강제 부역, 남녀 분쟁, 저출산 고령화, 노키즈존, 진상 갑질, 정치인 꼬라지 등등, 그래서 우리는 헬조선이라고 부른다. 나도 그런 줄 알고 프랑스 이민 꿈에 부풀어 여기까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의료시스템은 너무나 훌륭하다.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담당 환자든, 아니든간에 따지지 않는다. 아픈 사람은 한국에 어느 병원이든 예약 없이 가서 바로 치료를 받을 수가 있다(일부 대학병원 제외). 아기들은 개월수에 맞춰서 예방 접종하라고 부모에게 문자를 보내준다. 그러면 한국에 있는 어느 소아과를 가도 백신을 맞을 수가 있다. 한국 의료계에 종사하시는 의사, 간호사, 행정직원 등등 모두 막중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해 환자를 돌본다.


사실 한국에 살 때는 의료와 치안 같은 단어를 떠올려 본 적이 없다.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었으니까. 프랑스에 오고나서야 알았다. 119를 불러도 출동 안할 수도 있고, 112를 불러도 출동 안할 수 있다는 것을. 의료와 치안이 붕괴되고 나면 일상 생활이 불안해진다. 상대적으로 노인이나 아이들, 여자들에게 더더욱 가혹하다. 다음번에는 치안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다. 앞으로 프랑스에 얼마나 있어야 할지 모르지만, 전쟁터에 나온 종군기자의 마음으로 이렇게 기록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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