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비 Jun 03. 2022

밑반찬을 재는 일요일 오후 (1)

냉장고를 비우고, 파먹고, 채우는 시간

퇴근하자마자 유치원에서 아이를 하원시켜 집으로 돌아오면 다섯 시가 조금 안 되었다. 첫 돌이 지나고 유아식을 시작할 때부터 저녁 먹는 시간은 늘 여섯 시였다. 한 시간 남짓 주어진 시간동안 쌀을 씻어 밥솥에 밥을 안친다. 국이나 찌개를 끓인다. 생선이나 고기를 굽는다. 식탁의 빈 자리는 오롯이 밑반찬으로 채워야 한다. 하원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반찬가게에 두어 번 들러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는 밑반찬도 사 봤다.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지겨워 관뒀다. 주말에 냉장고를 파먹을 겸 밑반찬을 만들거나 친정어머니께서 보내주신 밑반찬들로 식탁의 빈 자리를 돌려막고 나면 주말이다. 출근하지 않아 평일보다 한가하지만 주방에도 출근하고 싶지 않다. 근근히 배달 음식이나 즉석 식품으로 주말을 때우고 나면 곧 월요일이 코앞에 떨어지는 일요일 오후, 주차장에 차들도 꽉 차는 시간이다. 이제는 다음 한 주 살이를 생각해 볼 때다. 냉장고를 열어 지난 주 이때쯤 만들었던 밑반찬들을 꺼내 모두 버린다. 야채칸과 냉동실을 열어 뭐가 남았나 살펴보고 잠시 궁리한다. 그리고 만드는 밑반찬들은 반찬가게 못지 않게 지겨운 것들이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남은 애호박과 갈색팽이버섯을 꺼내 쫑쫑 썬다. 들기름이 있으면 좋겠지만 워낙 요리를 휘뚜루마뚜루 대충 하는 나에게 귀한 들기름은 어울리지 않아(서 없으니까) 팬에 중불을 올려 참기름을 두르고 쫑쫑대는 애호박과 갈색팽이버섯을 식칼로 옮겨 담아 달달 볶는다. 소금과 통깨를 솔솔 뿌려서 납작한 글라스락 반찬통에 옮기고 한 김 식힌다.


짜장을 만들고 남은 당근도 꺼내 감자칼로 껍질을 슥슥 도려낸다. 가늘게 가늘게 작게 작게 썬다. 수명이 다 되어 가는 쪽파도 꺼내 시들거리는 이파리를 떼내고 도도독 썬다. 볼에 계란을 5개 풀고 당근과 쪽파 쫑쫑이들과 함께 휘젓는다.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열기가 오르면 약불로 낮추어 계란물을 붓고 이리 터지고 저리 새는 계란물을 철통방어하며 계란말이를 완성한다. 계란물을 올리기 전 라이스페이퍼를 깔고 계란물을 붓기도 하는데 이러면 방어가 한결 쉽다. 김치를 쉽게 썰려고 대형 스텐 도마를 샀는데 계란말이 식힐 때도 잘 쓰고 있다. 스텐 도마 위에서 한 김 식힌 후 가지런히 썰어 마찬가지로 납작한 글라스탁 반찬통에 옮긴다.


이미 팬에 기름을 두 번이나 둘렀으니 마찬가지로 짜장을 만들고 남은 감자는 볶지 않고 조림으로 만든다. 숭덩숭덩 깍둑깍둑 대충 썰어도 손맛이 재밌다. 이번에는 웍을 꺼내 아! 또 식용유를 둘러야 한다. 그래도 볶는 것보단 덜 두르니까 스스로를 위로하며 깍두기 무를 닮은 감자를 들들 볶고 물을 부어 끓으면 간장 네 바퀴 올리고당 두 바퀴만 넣고 보글보글 뜸을 들인다. 마지막에 센 불을 올려 참기름과 통깨를 두르고 뒤적뒤적 한 후 반찬통에 옮기고 또 한 김 식힌다.


냉동실을 뒤져 마른 멸치를 꺼내 볶는다. 미역을 꺼내고 참치캔을 뜯어 참치 미역국을 끓인다. 국물 낼 때 쓰려고 샀던 황태는 바람 들어가기 직전인 시들한 무와 짝을 붙여 황태뭇국을 끓인다. 식빵 껍질은 믹서에 갈아 빵가루로 만들어 두었다가 짜장을 만들고 남은 돼지고기 안심이 떠올라 미니돈까스를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 둔다. 그러고도 남은 애호박, 감자, 당근 꽁다리를 쫑쫑 도도독 썰어 볶음밥용 야채로 소분해 냉동실에 함께 넣어 둔다. 여기까지 하고 나면 보통 냉장고가 텅 비고 그 자리를 한 김 식힌 후 뚜껑을 닫은 새 밑반찬들로 채우게 된다. 그리고 나면 인터넷으로 고기나 국거리나 우유, 계란, 과일, 신선채소 등을 주문한다.


다음날 배달온 식품들을 받아 냉장고를 채워도 반도 차지 않는다. 삼시세끼 주방 살림을 전담하고 있으니 냉장고가 비면 불안해야 하는데, 반 이상 차면 언제 다 비우나 싶어 불안하다. 과소비가 지나쳤다 싶어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무식하게 많이 만든 나를 원망하며 반 이상 남은 밑반찬들을 버리기도 했다. 미처 손대지 못하고 썩어 버린 채소들과 지구에게 미안해하며 곰팡이가 피어오른 녀석들을 버리기도 했다. 요리 실력이 부족해 먹지 못하고 버린 적도 있었다. 애초에 재주가 없으니 시행과 착오를 거듭해도 요리 실력은 나아지지 않았고, 주방 살림은 냉장고를 기준으로 꾸려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젠 습관처럼 일요일 점심을 느슨하게 먹은 후 냉장고를 비우고, 남은 식재료들로 다음 한 주 동안 먹을 밑반찬을 만들고, 식재료를 충동구매 하지 않기 위해 다음 한 주를 간신히 버틸 수 있을 만큼만 인터넷으로 장을 본다. 


대청소를 하느라 모처럼 집콕하는 일요일 점심으로 떡볶이를 해 먹으려 했다. 1+1으로 샀다가 그 지난 주에 소시지 야채볶음을 하고 한 봉지 남겨둔 비엔나 소시지와 제육볶음 할 때 쓰고 남은 양배추 꽁다리와 아직도 냉동실 구석을 구르고 있는 떡국 떡까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으니 딱 좋겠다 싶었다. 그러나 아이는 점심 시간에 맞춰 외갓집으로 놀러 갔다. 남편과 나는 아침일찍 시작한 대청소 강행군에 이미 시들시들하다. 아이를 친정집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토스트와 떡볶이를 사 와서 끼니를 때운다.   


끼니는 인생처럼 예기치 못한 것들의 연속이니 냉장고 속은 딱 맞아 떨어질 계산보다 더욱 성글게 비운다. 그 빈 틈을 일요일 점심처럼 느슨하게 메울 수 있도록.

 

이전 08화 엄마표 김밥이 그리울 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