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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Jun 17. 2022

엄마표 김밥이 그리울 때

아, 나 엄마였지.

김밥 말 준비를 한다. 손이 많이 가는 걸 왜 굳이 직접 해먹냐고 묻는다면 딸아이가 잘 먹어서 그렇다고 손쉬운 핑계를 댈 수 있다. 사실은 내가 먹고 싶어서인데 괜히 민망해서 스리슬쩍 묻어 간다. 김밥 한 줄이야 동네 김밥집에서 사 오면 그만인데 이 동네에는 꼬마김밥집만 세 군데나 있고 그 흔한 고O민, 김O네, 채O올 김밥은 커녕 하다못해 김밥천국도 분식 노점 가게도 없다. 설령 흔한 김밥집이 있어서 사 왔더라도 워낙 속이 빵빵해 한 입에 넣기도 어려울 김밥을 아이가 잘 먹을 리 없으니 안 될 말이다.


냉장고에서 오래 굴릴 수 있는 당근을 잔뜩 사뒀는데 마침 또 사둔 오이가 상할 준비를 하면 김밥을 말 때가 되었다. 단무지와 우엉세트와 김밥햄을 산다. 밥물을 조금만 적게 해서 찰진밥 말고 보통밥 모드로 맞춘다. 김밥이나 유부초밥에 쓸 밥은 찰기가 없는게 낫다. 무압력밥을 하면 더 낫다고 하는데 한 번 설정만 해 보면 될 것을 굳이 귀찮으니 내버려 두고 밥솥에 시동을 건다. 오이는 길게 4등분한 뒤 씨를 갈라내고 다시 3~4등분한다. 당근도 오이와 비슷한 두께로 썰어 낸다. 식용유를 두른 팬에 각각 소금을 한 꼬집 뿌려 볶아 한 김 식힌다. 계란은 3~4개 깨뜨려 조금 두툼하게 구워 한 김 식힌 후 당근, 오이와 비슷한 크기로 썰어 낸다. 햄은 끓인 물에 잠시 데쳤다가 오이, 당근, 계란을 부쳤던 팬에 드르륵 볶아 낸다. 단무지와 우엉은 비닐을 잘라 물기를 뺀다.


넓은 접시에 나란히 정렬한 단무지, 우엉, 햄, 계란, 오이, 당근이 알록달록 예쁘다. 대체로 연필보다 조금 더 두껍다. 오이와 당근과 계란과 우엉을 얇게 채쳐서 빵빵하게 속을 채운 적도 있었지만 아이가 먹기에 너무 크고 김밥 말 때도 옆구리 터질세라 신경 써야 하는 등 공이 너무 많이 든다. 어묵, 참치를 넣고 더 호사스럽게 만들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집에서 해먹는 김밥 특유의 깔끔한 맛이 떨어진다. 때마침 밥이 다 되었다는 신호가 울린다.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리는 밥알에 소금과 참기름으로 짭조롬하게 간을 하고 나니 헐, 김밥 김이 딱 3줄 뿐이다. 아파트 바로 옆의 슈퍼마켓에 휘리릭 다녀오면 그만이지만 이제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혼자 두고 다녀올 수도 없다. 한창 저 혼자만의 놀이가 중단되어 심통이 난 아이를 어르고 달래 가며 김을 사 왔다. 슈퍼마켓 옆 문구점에 들러 하나에 200원 하는 사탕과 젤리도 두 손 가득 사들고 오는 바람에 혼자 가면 3분만에 다녀올 걸 10분은 족히 더 걸렸다. 숨가쁘게 비닐 장갑을 끼고 김밥을 만다.


일단 한 줄 말고 꽁다리부터 썰어서 한 입에 쏙. 두 손가락 끝으로 슥슥 한꼬집 뿌렸을 뿐인데 소금 간이 완벽하다. 그 다음 한 알 썰어서 아이 입에 쏙. 그리고 나서 줄줄줄 말고 나니 총 8줄이다. 단무지가 많이 남긴 했지만 나머지 재료들은 아낌없이 다 썼다. 남은 단무지들은 미련 없이 버리고 아직 퇴근 전인 남편 몫으로 4줄은 남긴다. 나머지 4줄을 한 알 한 알 썰어 넓은 접시 위에 총총. 아이에게 앞접시를 하나 내어주니 어떤 건 통째로 냠냠, 어떤 건 일부러 옆구리를 터뜨려 김이랑 밥이랑 단무지랑 햄이랑 계란만 따로따로 쏙쏙. 앞접시 위에 연둣빛 주황빛 갈빛 조각조각이 가득하다. 당근이랑 오이랑 우엉도 같이 먹으라고 한소리 했더니 나중에 한꺼번에 먹을 거란다. 그러고는 김밥이 동이 나니까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도 그만 배가 부르다며 뻔뻔하게 자리에서 내려온다. 순대를 썰어 오는 건 아니지만 남편 몫으로 남겼던 김밥 중 한 줄만 더 가져와 썰어 내어 아이에게 주니 또 따로따로 쏙쏙 먹다가 마지막 한 알은 엄마 눈치를 살짝 보면서 통째로 잘도 먹는다. 둘이서 다섯 줄을 뚝딱 해치웠다. 


김밥을 한 입 가득 밀어 넣고 우물거리는 통에 말할 수 없어도 우린 잘 알고 있다. 우리가 함께 먹은 이 김밥을 흔히 엄마표 김밥이라 부른다는 것을. 설렘으로 밤새 잠을 설치다 새벽같이 일어나 나보다 더 새벽같이 일어났던 엄마 옆에 앉아 그녀가 입에 넣어 주는 김밥 한 알을 우물거리던, 세상 맛있던 그 맛보다 더 맛있는 것 같은 이 엄마표 김밥을 만든 사람이 나라는 것을. 


엄마는 다른 음식들도 참말로 호사스럽고 맛깔나고 보기 좋게 만드는 재주가 특출났다. 그건 김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우리 엄마가 만들었으니까, 그 자리에서 바로 한 알만 감질나게 맛봐서 맛있는 김밥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전학을 오자마자 수학여행을 가는 바람에 친구 하나 없이 담임 선생님 옆자리에 앉아 둘이서 점심을 먹어야만 했을 때, 담임 선생님이 우리 엄마 김밥을 한 알 맛보시고는 진짜 맛있다고 쑥스러워하시며 조심스럽게 몇 알 더 드셨던 그 김밥을 만든 사람이 바로 우리 엄마였다. 수학여행을 지나고 졸업식을 거쳐 어른이 되면서 엄마표 김밥을 맛볼 기회는 줄어들었다. 가끔 엄마가 무슨 기분이 내켰는지 김밥을 만들어 주실 때면 잊고 있던 세월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것처럼 그때의 고소하고 알록달록한 맛이 나지 않았다. 추억 탓인지 엄마의 솜씨가 떨어져서 그런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나마도 결혼을 하고 나서는 단 한 번도 엄마의 김밥을 맛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냉장고에 구르는 당근과 오이가 보기 싫어 김밥을 대충 만들었더니 추억 맛이 고스란히 난다. 맛있다. 하나만 더 먹고 그만, 을 반복하다 두 줄이고 세 줄이고 계속 맛을 보고 있었다. 가족 나들이를 갈 때 두르륵 싸 가기도 하고 출근길에 휘리릭 말아 가기도 했다. 맛있단다. 저희 엄마가 만들어 주셨어요, 라고 말할 뻔 했다. 그냥 냉장고도 비울 겸 해 봤어요. 영 쑥스럽다.


나는 엄마를 닮지 않았다. 손재주도 없고 꼼꼼하지도 못해 아무래도 솜씨가 부족하다. 그런데 이 김밥, 내가 만든 건데 왜이렇게 맛있는 거야. 우리 엄마 김밥이 맛이 없어져서 그런가. 맛있다 맛있다 진짜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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