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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Apr 22. 2022

카레를 만들다

케첩을 넣으면 더 맛있어진다는 비법은 언제 써먹을 수 있을까


2주? 3주? 한 달? 쯤 전에 샀던 흙당근과 흙감자가 냉장고 야채칸에 온통 흙을 바르며 굴러다니는 꼴이 보기 싫다. 오늘은 카레를 만들겠다고, 전날부터 생각했다.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돈까스 만들다 남은 돼지등심 세 덩이를 아침 출근 전에 일찌감치 냉장실로 옮겨 두었다. 퇴근하고 흙당근과 흙감자와 양파 하나와 함께 꺼냈더니 딱 칼질하기 좋을 정도로 해동되어 있다. 흙당근과 흙감자는 비닐 째로 물에 담가 흙을 좀 빼고, 감자칼로 슥슥 껍질을 도려 낸다. 길쭉한 당근은 슥슥 도려 내는 손맛이 좋은데 감자는 하필 알감자라 손끝이 조심스럽다. 껍질을 벗긴 감자는 반으로 세 번씩 자르며 당근보다는 조금 더 큼직하게 잘랐다. 당근이 아직 남아 있는 줄 모르고 세척당근 한 봉지를 더 사는 바람에 아직 냉장고에 당근이 많다. 당근 김밥이라도 해 먹어야 되나. 딴생각에 빠져 드는 동안 감자와 당근과 양파와 돼지등심까지 모두 깍둑깍둑 썰었다.


식용유를 두르면 될 텐데, 버터치킨커리 생각이 나서 웍을 꺼내고는 굳이 버터를 녹인다. 일부러 무염버터 대신 가염버터를 샀다. 건강보단 맛이다. 노릇노릇 버터와 함께 익어가는 감자 냄새를 맡으며 바로 꺼내 소금과 바질만 슥슥 뿌려 먹으면 좋겠다 싶다. 나는 카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남편이 카레를 환장하게 좋아하고, 딸아이도 순한 맛 카레는 그럭저럭 잘 먹는다. 


야채가 웍에 조금씩 눌어붙기 시작한다. 물을 두 컵만 붓고 끓인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카레 가루를 탈탈 털어 넣는다. 물이 조금 적다. 지난 주에 해 먹었던 짜장은 물이 너무 많았다. 이번엔 좀 되직하게 해 볼 요량이다. 재료들을 냉장고에서 꺼낼 때 케첩도 함께 꺼냈는데 맛을 보니 이미 충분히 간이 세서 넣질 못하겠다. 평소 간이 센 편이라 오늘은 좀 싱겁게 하자고 생각했건만 물을 적게 넣는 순간 오늘도 실패다.


카레에 케첩을 넣으면 맛이 좋다진다고, 돌아가신 시어머님이 알려 주신 게 벌써 5년 전인데 아직 한 번도 카레에 케첩을 넣어 보지 못했다. 케첩을 넣은 어머님의 카레 맛이 어땠는지 이제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우리의 첫 신혼집은 (지금은 시댁도 우리도 이사를 갔지만) 시댁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있었다. 어머님은 그 신혼집에 처음 오시던 날 매실액기스며 간장이며 각종 양념장들을 갖다 주셨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남편을 시켜 반찬을 날라 주셨다. 카레, 어묵볶음, 소시지 야채볶음, 진미채, 샐러드, 돈까스 등등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양상추와 파프리카, 오이 등을 먹기 좋게 잘라 씻어 물기를 빼 지퍼팩에 한 두번 먹을 양으로 소분해 넣어 주셨고 곁들어 먹을 훈제연어도 가끔 같이 사다 주셨다. 


그때는 왜 카레와 어묵을 이렇게 자주 해 주실까, 의문스러웠다. 뭘 해 먹어야 하나 생각이 안 날 때면 남편 좋아하는 카레며 어묵조림이며 소시지반찬을 만들고 있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니 우습지도 슬프지도 않다. 어머님께서 딱 한 번 나에게 평생 반찬만 만든 팔자라며 웃음 섞인 신세한탄을 하셨는데, 그때 같이 조금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은 결혼 준비를 할 때부터 어머님 성품이 좋으시고 반찬도 잘 만드셔서 크게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었다. 나는 그런 남편(그때는 예비 신랑)이 벌써 효자 노릇을 하려 드는가 싶어 조금은 불안했었지만 남편의 말은 허튼 소리가 아니었다. 언제나 나를 우리 집안 보석이라고 불러 주셨던 시어머님의 반찬 솜씨는 금손 중에서도 금손인 친정 엄마의 솜씨에 비교하면 아쉬웠을 수는 있겠지만, 남편 좋아하는 밑반찬들을 챙겨 주시면서 아마도 남편에게서 건네 들으셨을 나 좋아하는 샐러드니 훈제연어니 돈까스 등등을 챙겨 주시는 것들은 세상 제일 맛있었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함께 한 시간은 3년이 채 안 되지만, 지금 나의 반찬 만드는 스타일은 왠지 금손 중에서도 금손인 친정 엄마보다는 오히려 돌아가신 시어머니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친정 어머니의 디테일함을 따라가기도 어렵겠지만 아마도 만드는 반찬이 비슷해서 그럴 것이다. 거기에 하나뿐인 딸은 남편의 입맛을 꼭 닮았으니, 내 반찬들은 아마 더욱 시어머니의 것을 닮아 갈지도 모르겠다. 


맞벌이를 하며 육아와 살림을 함께 나누는 아내가 매사 종종거리며 삼시세끼에 스트레스를 받는 바람에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퇴근해 자기만 먹으라고 오롯이 차려 주는 저녁 밥상을 미안해하며 먹는 남편에게 가끔 미안하다. 물론 친정 엄마도 남편이 좋아하는 돼지김치찌개(나는 이걸 못 먹는다)를 가끔 보내주시긴 하지만, 나는 이제는 손에 익어버린 - 그가 좋아하는 카레, 어묵, 소시지볶음, 마파두부, 순두부찌개를 만든다. 가끔 아삭한 양상추와 파프리카와 훈제 연어를 추억하면서.


텅 빈 카레 접시를 치우며 내일은 뭘 만들어야 하나, 생각한다. 냄새에 둔한 사람이 바다 냄새 나는 음식은 비려서 싫다고 하는데 다이어트를 한다고 당분간 저녁을 안 먹겠다니 마침 잘 되었다. 내일은 내 입맛대로 북엇국을 끓이고 생선을 구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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