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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May 27. 2022

꼬불꼬불한 어묵

아이를 위한 엄마표 수제 어묵 vs 간단한 부모님 한 끼 차림

김밥을 만드는 김에 딸아이도 함께 하면 좋겠다 싶어 큰 상을 폈다. 오이, 계란, 당근, 우엉, 어묵을 가지런히 늘어놓은 트레이와 도마를 상에 올리고 딸아이를 앉혔다. 길게 반으로 자른 김밥김 위에 밥을 올리고 딸아이에게 재료를 올린 후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는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른다. 엄마와 함께 요리하는 것도 좋고 김밥을 먹는 것도 좋았을 것이다. 먼저 말아 놓은 김밥을 썰고 있는 동안 재료를 하나 하나 호명하고 있는 딸아이의 노랫소리는 듣지 못했다. 아이가 느슨하게 말아 둔 김밥을 다시 단단히 말아 동그랗게 썰어 아이 입에 바로 넣어준다. 김밥 만드는 걸 잠시 멈추고 볼이 미어지다 못해 켁켁대며 김밥을 먹는 아이의 얼굴이 귀엽다. 남편에게 미리 동영상 촬영도 하고 사진도 찍어달라 부탁했다. 꼬다리를 몇 개 집어 먹고 나니 배가 부르다. 반 줄짜리 김밥을 스무 줄 가까이 말고 나서야 김밥 만들기가 끝났다. 자리 치우는 건 남편에게 부탁하고 동영상을 튼다.


"계란~ 당근~ 우엉은 두개~ 어묵~ 꼬불꼬불한 어묵~ 오이? 오이도 넣고~ 단무지~ 다 했어요! (제 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해 먼저 썰어둔 김밥에 손을 대며) 김밥 커몬~"


꼬불꼬불한 어묵,을 외치는 목소리가 몹시 꼬불꼬불해서 더 귀엽다. 아이가 어묵을 처음 접한 건 이유식에서 유아식으로 넘어가던 시기 즈음이었다. 오징어에 전분가루, 밀가루, 애호박, 당근을 조금씩 넣고 믹서기에 갈아 되직한 반죽을 만든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동글동글하게 볼을 만들어 종이호일을 깐 에어프라이어에 올린다. 10분 내외, 모양이 유지될 정도로만 익힌다.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가 조림이나 국에 넣어 반찬으로 낸다. 오징어 대신 흰살 생선을 넣기도 한다.                                                            


아이는 어설픈 엄마표 수제 어묵을 그럭저럭 잘 먹었다. 두 돌을 꽉 채울 때까지 다른 어묵은 거의 먹이지 않고 이 되다만 어묵만 먹였다.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한 절친이 아이들에게 어묵은 웬만하면 안 먹인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뭐가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으니 찜찜하다는 것이었다. 소시지나 햄버거 패티와 한통속인 음식이구나! 아이는 분유부터 유아식까지 먹는 것만큼은 별로 애를 먹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세 돌 가까이 될 무렵까지 시판 음식이나 가공 식품에는 손을 대지 않았었다. 아무렇게나 대충 해서 냉장고에 넣어 둔 오래된 음식을 차갑지 않을 정도로만 렌지에 돌려 주어도 그럭저럭 잘 먹었다.


아이 밥을 따로 챙겨 나가는 것이 슬슬 귀찮아질 무렵, 우리 가족은 강변 주막촌에 나들이를 갔다가 쌀쌀한 날씨에 꼬치어묵 한 그릇을 사먹으며 아이에게 처음으로 어묵을 먹여 보았다. 아이는 꼬치 끝을 위태로울 정도로 요리조리 피하며 퉁퉁 불어터진 네모 꼬치 어묵을 꼬불꼬불 잘만 먹었다. 그동안 수고롭게 믹서기에 갈고 에어프라이어로 틀을 잡고 요리를 해 왔던 나의 노고가 와장창 무너지는 것만 같았지만 꼬치 끝을  요리조리 피하며 어묵을 오물거리는 입술이 너무 사랑스러워 억울하거나 속상해 할 틈도 없었다. 이 꼬치어묵을 시작으로 아이는 슬슬 가공식품과 시판음식에 눈을 떴다. 우동, 라면, 돈까스... 도시락과 보냉팩에서 드디어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할 때, 기껏 차린 반찬을 아이가 먹지 않을 때 바로 해 먹이려고 꼬치어묵 한 봉지 정도는 항상 냉동실에 넣어 둔다. 의도대로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갑자기 친정 부모님과 시아버지가 집에 오셔 밥상을 차려야 했을 때 딱 한 번씩 요긴하게 활용했었다. 온 가족이 한창 늘어져 있던 일요일 오전, 친정 부보님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 집 근처 수목원에서 산책을 마치고 나니 마침 점심 때라 너희 집에 들러 손녀 얼굴도 보고 겸사겸사 짬뽕이나 한 그릇 먹고 갈테니 시켜달라고 하신다.(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아이를 봐 주시고 계셔서 부모님도 식당 출입을 웬만하면 안 하시던 때였다.) 큰 냄비를 꺼내고 무, 파, 양파를 숭덩숭덩 썰어 넣은 후 간장을 붓고 참치액을 조금만 붓는다. 어묵도 한 번 끓인 물에 데쳐내야 하지만 귀찮다. 양푼에 꼬치어묵을 넣어 두었다가 커피포트에 물이 끓으면 잠시 부어 두는 걸로 대신한다. (해동도 살짝 되고.) 간장 채수가 끓을 때 어묵을 넣으면 끝. 당근, 애호박, 양파 등 자투리 야채들을 꺼내 모조리 채썰고 부침가루를 개어 전도 부친다. 남편을 시켜 막걸리도 한 병 사 오게 해서 그럭저럭 훈훈하게 점심을 때웠다. 


며느리 눈치를 본다고 좀처럼 집에 오시는 일이 없는 시아버지는 지난 해 이맘때쯤 딱 한 번 기습 방문을 하셨다. 어린이날에 주려고 인터넷으로 주문한 선물이 뒤늦게 도착한 것이다. 마침 아이 먹일 저녁을 막 준비하려고 부엌에 들어섰는데 아버님이 오신다고 배달 음식을 시키자니 괜히 찔린다. 이번에도 만만한 어묵국을 끓이고 마침 한 봉지 사 두었던 냉동 빈대떡을 까서 해동한 후 부쳤다. 운전해 오셨으니 술은 못 냈지만 이번에도 그럭저럭 무사히 때웠다.                                                                               


뾰족한 작대기만 남은 꼬치를 치우며 마음이 꽁꽁하다. 아이를 위해서는 이렇게 손쉬운 어묵조차도 직접 만들어 먹였는데, 30년 가까이 나를 위해 매끼 밥을 차려주셨을 부모님을 위해서는 제대로 밥 한 번 차려드린 적이 없다. 소꿉장난 같은 생일상조차 엄마가 만들어 둔 밑반찬을 꺼내는 정도였다. 시어머니 빈소에서 스치는 사람들마다 아버님 밑반찬 잘 챙겨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게 무척 불편했었는데, 나도 잘 챙기지 못하는 시댁의 밑반찬은 친정 엄마가 가끔 챙겨 주신다. 단 한 번도 반찬이니 살림이니 운운한 적이 없는 시아버지의 침묵을 떠올리면 더욱 마음이 꽁꽁하다. 이런 생각으로 꽁꽁한 내 마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렇게 늙어 가나 싶다. 아직 나는 젊은데 이미 간장처럼 바랜 것 같아 더욱 마음이 꽁꽁해진다. 


집에서 만든 어묵국도 어묵 넣은 김밥도 하나같이 간장 빛이 돈다. 매운 어묵국이며 매운 어묵 김밥은 단 한번도 직접 만들어 본 적이 없다. 이젠 콩나물과 배추와 어묵에 고춧가루를 팍팍 넣은 빨간 어묵국을 끓여서 시댁에 한 봉다리, 친정에 한 봉다리 보내 볼까. 만드는 김에 매운 어묵 조림도 만들고 매운 어묵 김밥도 만들어서 남편과 둘이서만 냠냠 먹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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