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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Jun 24. 2022

함께여서 애증스런 외식

우아한 혼밥을 꿈꾸며

우리 세 가족만의 단출한 외식은 소박한 즐거움이자 미약한 괴로움이다. 아이가 아기였을 때는 보냉팩에 이유식을 담은 210ml 글라스락을 싸고 젖병, 분유, 보온물병까지 주렁주렁 달고 식당으로 향했다. 아빠가 아기 의자를 찾는 동안 엄마는 주섬주섬 아기 먹을 것을 준비했고 아이 밥 먹이기에 오롯이 집중해야 하니 엄마와 아빠가 번갈아가며 식사를 해야만 했다. 부모님을 모신 대가족 모임이나 여행 때문에 마지못해 나설 수 밖에 없었으며 외식만을 위한 외식은 할 수가 없었다.


유아식을 시작하고 나서는 조금씩 함께 먹을 수 있는 아주 한정적인 메뉴를 정해 외식했지만 그나마도 코로나를 맞으며 중단되었다. 가끔 자극적인 음식이 생각나 배달음식을 주문할 때면 아이에게는 냉장고에 잠자고 있는 반찬들을 꺼내어 데펴 주기만 했다. 이마저도 귀찮아지고 아이 입맛이 조금 더 여물면서 오븐에 구운 치킨, 짜장면, 돈까스, 파스타 등 배달시켜 먹는 음식의 범위를 늘려가는 동시에 좁혀갔다. 그리고 마침내 온 가족이 코로나에 확진되었다가 격리해제 되면서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삼겹살을 구우러 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세 가족만의 단출한 외식은 그 나름의 나른한 아취와 풍미가 있다. 남편과 나는 둘 다 말술은 아니지만 반주를 즐기는 편이라 외식만을 위한 외출을 할 때면 걸어 갈 수 있는 곳으로 범위를 한정한다. 애석하게도 우리 동네는 번화가를 끼고 있지 않아 선택지가 부족하다. 집에서 가깝고, 자리도 널찍하니 편하고, 아이도 잘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파는 곳은 단 한 곳 뿐이었다. 우리 아파트 바로 건너편에서 옛날통닭과 맥주 등을 팔고 있는 기찻간 콘셉트의 'OOOO치킨'이었다. 이 가게의 주력 메뉴인 옛날통닭은 염지가 되어 있지 않아 소금이나 소스를 찍어 간을 맞춰야 한다. 맵고 짠 걸 싫어하는 아이가 이걸 좋아하고 생맥주에 곁들일 먹태, 우동, 라면 등 안줏거리도 꽤 종류가 많아 우리 세 식구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곳이었다. 


날이 더워 저녁밥을 짓기 싫을 때, 하루 종일 외근에 시달려 시원한 맥주 한 잔 편히 마시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OOOO치킨'을 찾는다. 남편과 두런두런 지나온 하루를 이야기하며 편안하게 맥주를 마시려면 낡아빠진 에코백에 스티커북, 색연필, 도화지, 장난감 몇 종류를 함께 챙겨 집을 나서야 한다. 배가 터지도록 치킨과 우동과 맥주와 라면 따위를 먹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소화도 시킬 겸 학교 운동장이나 놀이터나 공원을 들른다. 늦겨울에 결혼해 늦여름까지 이어진 짧았던 신혼 시절의 여름밤을 이제야 다시 만끽한다. 여름밤 특유의 나른한 기분을 아이와 함께 누리는 시간이 몹시 달콤하다. 이 달콤함에 취해 지난 일요일 저녁 어린이 뮤지컬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굳이 분위기 좋은 하와이안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걸 포기하고 또 'OOOO치킨'에 들를 지경이지 뭔가.


우리 아이는 변비 때문에 반 년 넘게 차로 10분 거리의 OOO아동병원에서 변비약을 처방받고 있다. 대개 2~3주 간격으로 병원에 들러야 하는데 이 아동병원은 제법 큰 규모의 번화가에 있어 근처에 식당이 많다. 퇴근하고 아이를 하원시켜 병원에 들렀다 오면 딱 저녁 시간이라 한 번은 병원 바로 옆의 초밥집에 들러 돈까스와 우동을 먹고 돌아왔더니 그 다음부터는 아이가 먼저 나를 식당으로 이끌었다. 우동을 워낙 좋아해서 두 세 번 연속 돈까스와 우동 세트를 먹었더니 서로 지겨웠나 보다. 지난 번에 병원에 들렀을 때는 마침 비가 와서 병원 건물 1층의 수제 햄버거 가게에서 외식을 했다. 나는 치즈버거, 저는 그릴치킨버거를 시켰다. 아이가 한 입에 넣고 우물거릴 수 없으니 나이프와 포크를 받아 조각조각 잘라준다. 계란토스트를 해 줘도 빵과 계란을 분리해서 따로따로 먹는 아이라 이편이 오히려 더 먹기 좋다. 아이는 신나게 고기 조각과 빵조각을 우물거리고 감자튀김은 더 신나게 우물우물 냠냠 먹는다. 생각 외로 햄버거 맛도 그렇고 분위기도 썩 괜찮다. 맥주 한 잔 곁들이면 참 좋겠지만 콜라도 나쁘지 않다. 이제 다섯살이 된 딸아이와 둘이 마주 앉아 이게 맛있네 저게 괜찮네 유치원에서는 어땠니 드문드문 수다를 떠는 분위기가 썩 괜찮았다.


둘이서만 식당에 올 때는 아이의 식사를 도와주는 게 당연한 일이 되지만, 세 가족이 외식을 할 때마다 항상 나만 아이 옆에 앉아 식사를 시작할때부터 끝날 때까지 오롯이 도움을 주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특히 아이에게 뜨겁고 맵고 짜고 큰 음식들을 먹기 좋도록 호호 불거나 물에 적시거나 조각조각 자르거나 입에 넣어 주거나 여기저기 묻은 소스를 닦아 주고 바닥에 떨어진 장난감을 시도때도 없이 주워 올려야 하며 식사를 마친 후에 식탁과 바닥에 뒹구는 음식물을 치우고 보면 언제 밥 한 술 편안히 뜨나, 언제 제대로 음식 맛을 좀 느껴 보나, 언제 한숨 좀 돌려 보나 절로 한숨이 난다. 


남편은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왜 자꾸 밤에 혼자 야식을 먹냐며 이제 아이도 컸으니 맛있는 걸 밤중에 혼자 시켜 먹지 말고 저녁 식사 겸 같이 먹자고 한다. 지난 주 금요일은 그의 생일이었다. 우리는 회전초밥집으로 향했다. 아이가 회전초밥 레일을 재밌어 할 것 같아서였다.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초밥(유부, 계란 등)과 새우튀김을 고르고 자르고 식히는 밥시중은 당연한 부모의 임무인데도 첫 술을 들라치면 앵~하는 요청에 잠시 짜증이 났다. 초밥 접시가 넘치도록 배부르게 식사를 마쳤지만 초밥을 즐길 여유가 있었다기보단 밥도 빨리 먹는 급한 내 성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은유 작가의 수필에서 생일날엔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고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으러 외출한다는 글을 읽었다. 가족들이 내심 서운해 하지만 그녀의 뜻은 단호했다. 나는 곧 다가올 내 생일엔 혼캉스는 어렵겠지만 혼밥이라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혼밥을 할 내 신세가 처량할까봐 결국 꼬리를 내리고 스테이크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러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생일날에는 내 옆에 아이를 앉히지 않겠다고 다시 선언했다. 괜히 아이를 악의 없는 악역으로 만든 것 같아 미안하다. 아이는 매 끼니 식사를 할 때마다 외식보단 집밥이 좋다 하는데, 한그릇 특식으로 끼니를 때울 때면 흰밥을 달라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는데도 나 좋자고 외식을 나서서는 괜히 혼자 짜증만 쌓고 있었던 것 같아 미안하다. 아마도 나는 생일날 스테이크를 먹으러 가서도 아이를 내 옆에 앉히게 될 것이다.


요즘 '건강한 아이 되기'에 푹 빠진 아이가 저녁 밥을 먹을 때마다 흰밥을 달라, 브로콜리를 무쳐 달라, 파프리카를 잘라 달라며 투정 섞인 요구를 하는데 귀엽기도 하고 부담되기도 하고 영 어깨가 무겁다. 엄마의 무게이려니 생각하면 무거운 건 아니지만, 외식을 하러 가서도 고스란히 그 무게를 이어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니 영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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