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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Sep 01. 2022

친정엄마랑 서울여행

비록 즐기지 못한 것과 꼭 한 번 다시 즐기고 싶은 것

2019년 3월, 나는 3개월의 출산휴가와 6개월의 육아휴직 후 아직 돌이 되지 않은 아이를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복직했다. 동료들이 보통 18개월~24개월을 전후해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후 복직하는 것에 비하면 꽤 이른 복직이었다. 집에서 하루종일 아이와 둘이 보내는 것이 고역이기도 했고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친정엄마의 강요에 가까운 권유가 큰 역할을 했다. 엄마는 직업이 있는 딸이 주부가 되어 집에만 있는 모습을 보기 싫으셨던 것 같다. 다행히 아이는 순하고 얌전했으며 우리집은은 친정 바로 옆 아파트였고 친정엄마는 평소에도 바깥 활동을 잘 하지 않았던 덕분에 큰 고민 없이 복직할 수 있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친정엄마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고 있지만 아직 돌이 채 되지 않은 아이는 하루 온종일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다. 남편이 이 시기 야근이 잦았던 것도 더욱 나를 힘들게 했다. 힘든 건 친정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아이가 순하고 딸네 집과 가까이 지내도 체력이 예전같지 않은 나이에 하루 종일 아기 돌보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는 스스로를 젊은 할머니라 칭하며 아이와 매일 공원을 산책하고 일주일에 두 번 문화센터에 꼬박꼬박 출석하며 정성껏 손녀를 돌보았다.  



엄마에게 휴가를 주고 싶은데 또 집에만 있을 것 같아서, 날씨가 한창 좋은 10월에 엄마와 단둘이 1박 2일이라도 바람을 쐬고 오기로 했다. 마침 엄마가 서울에 한 번 가고 싶다고 한다. 아직 체력이 좋으니 여기저기 서울 구경을 하고 싶단다. 친척 결혼식으로 몇 번 서울에 다녀오긴 했지만 어디를 구경한 적은 한 번도 없단다. 경복궁, 남산, 청계천, 한강... 나에게도 익숙하진 않은, 엄마와 갈 곳들이 줄줄이 펼쳐졌다. 엄마와 나는 둘 다 쇼핑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오래 걷는 것 하나는 자신있었으므로 짧은 1박 2일을 빡빡하게 보낼 일정을 짜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여기랑 저기랑 가 보자고 줄줄이 브리핑을 하는데 엄마가 어딜 가든 괜찮으나 자고 먹는 데 큰 돈을 들이지 말란다. 서울 한복판에 비즈니스 호텔을 잡고 식사도 일정을 고려해 근처의 무난한 곳으로 예약했다. 당연히 엄마보단 내가 가고 싶은 곳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들의 여행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원래는 둘쨋날 저녁 기차를 타고 밤에 돌아올 예정이었는데, 우리가 서울 구경을 하는 동안 제 아빠를 따라 바깥 나들이를 다녀온 아이가 콧물이 나고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부리나케 기차를 다시 예매했다. 급한 와중에 점심식사를 예약한 파인다이닝 한식당은 취소할 경우 위약금을 고스란히 물어야 해서 이것만 먹고 기차를 타기로 했다. 분명 기차를 다시 예매할 때는 이정도면 됐겠지, 싶었지만 나도 엄마도 처음 가 보는 파인다이닝 식당이라는 곳에서 그렇게까지 여유를 부려 가며 식사를 해야 된다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다. 느긋한 음악이 흐르는 호텔 2층 로비에 도착해 운치 있고 예쁜 전통 장식을 바라보며 푹신한 소파에 앉아 우리 차례를 기다리는 그 짧은(예약을 했으니까) 시간마저도 우리에겐 분초를 다투며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파인다이닝이니 당연히 음식도 여유롭고 느긋하게 나와야 하는데 큰 접시에 예쁘고 작고 앙증맞은 음식들이 나오면 한 입에 털어서 먹어 치우고 바쁘게 눈알을 굴리며 다음 접시를 기다리느라 초조하다. 종내에는 들썩이는 엉덩이를 도저히 누를 수 없어 새빨개진 얼굴로 저기 정말 죄송한데 남은 음식을 좀 빨리 내어 달라며 부탁하고는 고운 자태를 감상할 시간도 없이 그곳을 벗어났다. 



나도 엄마도 난생 처음 맛보는 한식 파인다이닝 코스요리를 이렇게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으로 즐길 줄은 몰랐다. 우린 지방 사는 촌것들이라 그런 것도 아니고 배가 살살 아파 화장실이 급해 그런 것도 아니고 코스요리를 즐길 여유와 기품이 없어서도 아닌데 쪽팔리게 이게 뭐냐며 서울역까지 전력질주를 시작했고 기차가 떠나기 2분 전 극적으로 좌석에 앉아 먹은 것들의 아름다운 기운을 한숨으로 뿜어냈다. 굳이 이 시간에 기차를 예매한 회한과 딱 하루 맡겼는데 사태를 이렇게 만든 남편에 대한 원망과 의미 있을 서울 여행을 이렇게 끝내야 하는 허망함도 함께 뿜어내야만 했다. 하나같이 예쁘고 맛있었을텐데 맛은 커녕 뭐가 나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긴박했던 상황을 제외하고 기억에 남는 건 단 하나, 그 식당 특유의 있어 보이는 분위기였는데 엄마와 나에겐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부담이었다. 엄마는 자조섞인 웃음을 띠며 송충이는 솔잎 비슷한 감상평을 남기긴 했지만 나는 왠지 효년이 된 것만 같았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니 우리에게 주어진 식사는 첫날 점심, 저녁, 다음날 아침은 건너뛰고 점심 딱 세 끼 뿐이었다. 엄마는 아무거나 먹으면 된다고 했지만 절묘한 메뉴 배치가 필요했다. 가장 힘을 주어야 할 때가 바로 첫날 저녁일 터였다. 그래도 저녁이니 묵직하게 먹어야 되겠지? 저녁엔 한강에서 유람선을 타기로 했는데 여의도에서 마땅히 갈 만한 묵직한 식당을 찾기가 어려워 광화문에서 한우 오마카세 식당을 찾아 이른 저녁을 예약했다. 오붓하게 둘이 와인도 한 잔 마시고 직원이 일일이 구워 주는 고기를 우아하게 한 점 한 점 즐길 생각을 하니 엄마도 나도 벌써 즐거웠다. 5시에 딱 맞춰 식당으로 들어가니 시간이 워낙 빨라 손님도 많지 않았다. 손님이 너무 적어서(거의 우리 뿐이었다)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우리의 예상대로 오붓하고 우아하며 여유롭게 코스를 시작했다. 너무 여유를 부렸던 탓일까 원래 우리의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탓일까 여유는 점차 우리를 쫓아오기 시작해 고기를 다 끝내고 밥이 나올 때쯤엔 슬슬 한강 유람선 시간이 눈앞에 잡힐 것처럼 다가왔다. 엄마,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아. 그래? 이제 밥만 먹으면 되니 빨리 먹어 치우자. 살짝 오른 취기와 통통하게 올라 출렁이는 뱃살을 꼭꼭 누르며 우리는 지하철 역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열심히 달려 간신히 유람선 탑승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서울의 멋진 야경과 유유히 흐르는 한강 위로 화려한 불꽃이 펑펑 터졌고 우린 여유 부리며 시작하다 다급하게 끝난 한우 오마카세 정식 코스도 함께 기억 속에서 펑펑 날려 버렸다. 



숙소는 명동에 있었다. 한강 유람을 마친 후 먹거리가 가득한 야시장 구경도 빼먹지 않았지만 우린 저녁에 뭘 먹었는지 자세히 기억도 하지 못하면서도 소화가 되지 않아 속이 더부룩했다. 덕분에 맛나고 저렴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비싼 명동 야시장 포장마차 주전부리들을 하나도 맛볼 수 없었다. 알록달록한 탕후루, 포장마차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랍스타구이, 내가 좋아하는 염통꼬치와 끝까지 엄마를 (먹을까 말까) 갈등에 빠지게 했던 과일들까지, 쇼핑에 취미가 없던 우리들은 이것도 맛있겠다, 저것도 맛있겠다, 망할 놈의 한우 때문에 먹지도 못하고, 부지런히 눈으로만 담았다. 취기가 싹 날아간 뒤 남은 건 숙취 뿐이었고 혀끝에 살살 녹던 빨간 소고기의 느낌이 다 녹고 나서 남은 건 여전한 뱃살 뿐이었다. 우린 이유도 모르면서 그래도 한 번쯤 먹을만 하지 않았냐고 한우 오마카세 식당의 평점을 매기고 잠을 청했다. 그때만 해도 다음날 점심을 더 급하게 날려 버릴 줄은 생각도 못했고 그저 아이의 열이 떨어지기만을 바라며, 열이 떨어지든 오르든 내일 점심만은 제대로 누려 보자고 다짐했었다.



파인다이닝 한식 코스도, 한우 오마카세 코스도 역시 맛보다는 분위기와 비싼 값으로 먹는 것이었을까? 우린 서울 여행을 다녀온 후 뭐가 제일 먹을만했냐는 가족들의 질문에 똑같이 다운타우너 버거라는 답을 내놓았다. 서울에 도착한 후 제일 먼저 갈 곳으로 경복궁을 잡았는데 이는 순전히 엄마가 서울에 가면 경복궁도 보고, 라는 말을 제일 먼저 꺼냈기 때문이었다. 경복궁을 관람하고 삼청동을 지나 북촌 한옥마을을 구경하면 좋겠다고 나는 줄줄히 동선을 꿰어 나갔다. 그 사이에 낀 점심 식사로 삼청동 칼국숫집을 갈까 한옥을 개조해 만든 파스타집을 갈까 고민하다 순전히 내 취향대로 안국역 앞 다운타우너 버거에 가 보면 어떻겠냐고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는 햄버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가끔 치킨버거 반쪽을 먹는 건 본 적이 있었다. 엄마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내가 햄버거를 좋아해서 그런 것 같기도 했고 왠지 가게 이름도 메뉴도 젊은 사람들이 득시글거릴 것 같아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나름대로 일찍 도착했지만 다운타우너 버거 앞에는 긴 줄이 늘어졌고 우리는 12, 13번째 정도로 대기를 시작했다. 메뉴를 보다 이 가게의 시그니처 메뉴가 아보카도 버거인 걸 보고 나는 또 한 번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가 아보카도 특유의 낯설고 물컹한 식감을 좋아할까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엄마는 이또한 흔쾌히 수락했고 우린 나란히 아보카도 버거 세트 두 개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질질 흘리지 않으려고 잔뜩 신경을 쓰며 한 입 크게 베어 문 덕분에 입 안에 가득 퍼지는 패티와 아보카도와 번과 소스의 풍미를 한껏 느꼈다. 사람은 많았지만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참 좋았던 경복궁을 돌아보고 수제 햄버거를 먹는 기분이 한껏 만족스러웠다. 한옥을 리모델링한 가게와 '힙'하게 차려 입은 젊고 푸른 사람들 사이에서 이목구비가 닮은 할줌마와 젊줌마가 나란히 무릎을 맞대고 앉아 수제 햄버거를 맛보는 기분이 한껏 즐거웠다. 가게의 시그니처 메뉴를 선택한 건 역시 옳은 선택이었고 집순이 중에 집순이인 친정엄마와 서울 핫플(이겠지?)을 가 보는 도전도 옳은 선택이었으며 칼국수 대신 햄버거를 택한 것도 옳은 선택이었다. 내친 김에 우리는 소화도 시킬 겸 삼청동 블루보틀까지 걸어갔다. 지방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긴 줄을 선 끝에 카페에 입장하는 체험도 했다. 내가 커피를 받아오는 동안 매의 눈으로 움직인 엄마 덕분에 절묘하게 북악산을 담고 있는 블루보틀 3층의 너른 창을 바라보며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었다.



엄마가 지극 정성으로 키운 딸아이가 이제 다섯 살, 엄마는 어느덧 나이 앞자리가 바뀌고 환갑까지 일년을 남겨두게 되었다. 아마도 나는 그때쯤 한정식, 일식, 중식, 각종 코스요리가 나오는 룸이 딸린 식당을 찾아보며 예약에 분주할 것이다. 비록 우리가 파인다이닝 식당에서 뭐가 나온 지 하나도 기억을 하지 못하지만, 한우 오마카세 식당의 밥은 괜찮던데 고기는 거기서 거기더라는 평을 남겼을지라도 나는 조금이라도 더 정갈하고 맛있고 조용하고 비싼 식당을 찾아 헤맬 것이다. 그래도 나는 땀내와 향수와 분내가 넘치던 사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줄을 서야 하는 곳, 놋그릇에 숟가락과 젓가락 말고 일회용 나이프와 포크와 스텐 앞접시를 써야 하는 곳, 주차장은커녕 발품을 팔아도 찾기 어려운 핫플에 다시 한 번 엄마를 데려 가고 싶다. 밤을 밝히는 전구가 번쩍번쩍 빛나고 화려한 전자음이 왕왕 귀를 울리며 기왕이면 외국어가 적혀 있는 병맥주를 딸 수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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