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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Jul 24. 2022

촉촉한 여름 날씨에 뜨끈한 우육면

타이페이의 애국자

5월 초의 타이페이는 몹시 덥고 촉촉했다. 어린이날과 부처님오신날이 연달아 이어지는 5월 초의 5일간 연휴면 여름보다는 봄에 가까운 계절이니 그래도 덜 덥겠거니 했지만 남쪽 나라의 더위와 물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새벽에 도착해 짐부터 풀고 심드렁한 호텔 조식으로 아침을 때운 후 가볍고 예쁜 원피스 자락과 잘 만진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타이페이의 시먼딩 거리를 내딛기 시작한 지 10분이 채 되지 않아 이번 여행을 함께 한 영이 언니도 나도 너나할 거 없이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맸다. 그럴 수밖에 없는 더위와 물기였다.



오늘의 첫 관광 일정은 육신사에서 시작했다. 타이완 사람들과 관광객들이 한데 섞여 향을 사르고 절을 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고 친근했다. 우리가 기대한 것은 친근한 관광지가 아니라 끼니를 때울 맛있는 음식과 중간중간 입맛을 돋을 간식들이었다. 타이완 여행의 이유는 역시 식도락일 것이다. 공차로 유명한 타피오카밀크티, 소금 커피, 망고 빙수, 딤섬, 젤리, 펑리수, 타이완 맥주, 맛있는 볶음밥과 야시장의 노점 음식점까지 위의 용량이 한정되 있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우리가 먹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중 동선을 고려해 가장 먼저 택한 것은 바로 융캉제의 우육면이었다. 



나름대로 일찍 길을 나선다고 갔지만 이미 정오를 살짝 넘긴 한낮, 땡볕과 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이 빽빽하다. 으레히 여행 책자나 블로그에서 알려진 외국 맛집들은 여행객들에게나 맛집이지 현지인들은 멀리하는 곳이지만 이 식당의 긴 줄 곳곳이 중국어가 들리는 걸 보니 외국인보단 현지인이 훨씬 많은 곳이다. 그래도 제대로 찾아왔다고 좋아하며 긴 줄의 끝까지 따라가 줄을 서는 걸 보면 나와 언니는 둘 다 다행히 먹을 것에 진심이었다. 국숫집답게 가게 회전율이 좋은지 줄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고 머리를 질끈 동여맨 덕분에 더위도 그럭저럭 견뎌낼만 했으나 문제는 갈증이었다. 오전에 이미 편의점 밀크티를 한 잔 마신 덕분에 입 안은 몹시 들척지근하고 텁텁했다. 



목말라 죽을 것 같아요. 나도나도 죽겠다 진짜. 한 명이 줄을 서고 한 명이 편의점에 들러 물이라도 사 와야 할까 고심하는 사이 우리 차례가 다 되었다! 일단 들어가자마자 매운 우육면과 순한 우육면과 코카콜라부터 주문했다. 더욱 다행스럽게도 코카콜라와 유리컵부터 나왔다. 빨간 캔에 하얀 글자로 적힌 그 유명한 '가구가락' 문구를 볼 새도 없이 캔부터 따고 유리컵에 코카콜라를 부었다. 캔에 맺혀 있던 차가운 물방울이 손끝에 묻어났다. 빨대를 꽂을 새도 없이 꿀꺽꿀꺽, 가구가락. 아! 이 집은 일단 콜라 맛집이었다. 환장하게 맛있고 시원했다. 호텔 신라의 망고 빙수도 한여름의 아이스아메리카노도 호텔 수영장에서 물을 잔뜩 머금고 나와 마시는 생맥주 한 캔도 이 콜라 맛에는 이길 수 없다! 조금만 더 맛있었으면 진짜 울 뻔 했다며 낄낄대는 사이 나란히 우육면 두 그릇이 나왔다.



동그랗고 큰 그릇에 빨간 기름과 하얀 기름이 동동 떠다니고 정체모를 부위인 듯한 소고기 덩어리가 듬성듬성 보이는 뜨끈한 고기국수 두 그릇이다. 제주도에서 만난 고기국수를 닮았나 싶기도 하고 짬뽕을 닮았나 싶기도 하다. 우리네 칼국수나 잔치국수와는 그 결이 완전히 다르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오히려 곰탕이나 육개장을 닮았다. 나는 곰탕도 육개장도 그렇게 즐기진 않는데, 혹시 우리의 선택이 잘못된 건 아닌지 슬슬 걱정스럽다. 다행히 여기서 우리의 취향은 확실하게 갈라졌다. 나는 내심 하얀 우육면이 먹고 싶었고 언니는 내심 빨간 우육면이 먹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하얀 우육면과 빨간 우육면을 호명했다. 그리고 잘 되었다며 테이블 중앙에 애매하게 놓인 우육면을 하나씩 각자의 앞으로 끌고 왔다.



짭짤하게 간이 배어든 면은 고급스러운 수타면도 아닌데 호로록호로록 언제 끊어야 할지 가늠이 어려울 정도로 찹찹 입에 붙는다. 목 뒤에 질끈 동여맨 머리카락이 땀에 절어 착 달라붙는 것보다 더 입맛에 착 들러붙는 맛이다. 더운 날씨에 더 더운 것을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는데도 반가울 정도로 미끈하게 넘어가며 다음 한 입을 다신다. 고기는 오래 삶아 쫄깃하기보단 부드럽다. 비계와 살코기가 제멋대로 뒤섞여 손쉽게 젓가락이 가지 않는 모양새지만 한 번 입에 넣고 적당히 우물거리면 살살 녹아 없어진다. 나는 고기를 좋아하지만 비위가 약해 은근히 까다롭게 부위를 골라내야 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종종 보이곤 하는데 옆에 앉아 빨간 우육면을 나와 비슷한 속도로 들이키고 있는 언니에게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되니 다행스럽다. 국물은 수저로 떠 먹기 아쉬울 정도다. 희한하게도 밥을 말아 먹을 생각은 나지 않지만(그러기엔 날씨가 너무 덥지 않았을까?) 두 손으로 큰 대접을 받쳐 들이키고 싶을 정도로 중독적이다. 



그렇기도 했고 배도 고팠고 기다림과 더위에 이미 지쳐 있었던 나와 언니는 잠시 말없이 식사에만 집중하다, 1/3 정도를 남겨놓고 나서 서로가 맛보지 못한 상대방의 우육면에 동시에 시선이 쏠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금 남은 다른 우육면을 권해 본다. 이제 어느 정도 여유를 찾았으니 수저 위에 조심스럽게 빨간 우육면을 한 젓가락 올려 맛을 본다. 요건 요것대로 또 맛있다. 내가 하얀 우육면을 택한 이유는 순전히 육개장보다 곰탕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었는데, 의외로 육개장 맛보다는 얼큰한 칼국수와 라면과 고기짬뽕을 섞어 놓은 것 같은 맛이 난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맛있으니 되었다. 국물도 그 못지 않은 맛이 난다. 그래도 곰탕과 육개장을 싹 잊고 <타이페이 우육면 최고!>라고 지금까지 기억에 남을 정도니, 그래도 해외여행을 다녀온 보람을 느낀다. 오죽하면 한국에 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농O이라는 라면 기업에서 우육면 라면을 처음 선보였을 때 반색하며 바로 사오지 않았겠나. 심지어 그 라면조차 맛있었으니 역시 우육면 최고! 였다.


짬뽕이나 설렁탕, 고기국수를 만날때면 어김없이 타이페이가 떠오른다. 한여름이 돌아와 빙수를 주문할 때면 또 타이페이가 떠오른다. 타피오카 밀크티를 주문할 때도 예외는 없다. 더운 날 시원한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킬 때도 어김없이 타이페이가 떠오른다. 이토록 타이페이를 곳곳에서 떠오르게 하니 타이페이의 융캉제의의 허름한 맛집 우육면 식당 주인은 진정한 애국자일 것이다. 폭염과 장마로 널브러진 초록 이파리 못지않게 시들시들한 가족들과 냉면에 콩국수를 주문해 호로록호로록 넘기며 타이페이의 가구가락과 우육면을 다시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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