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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Aug 25. 2022

도쿄에서: 맛있는 혼밥(2)

먹을 것만 보면 그저 행복한 나는 여전히 영락없는 어린아이라서 더 행복해

우에노 시장의 회덮밥

우에노 공원은 도쿄의 유서깊은 공원 중 하나라고 한다. 날이 너무 더워 한낮에 다니기는 무리였다. 여행 후반부 저녁 즈음 우에노 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햇살도 내 체력도 이미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도쿄는 서울보다 해가 한 시간 일찍 뜨고 한 시간 일찍 진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덕분에 이미 주위는 어둑어둑했다. 공원은 내가 살고 있는 대구의 달성공원 같고 감흥도 다 떨어져 공원 산책은 바로 포기하고 우에노 시장으로 향했다. 더 늦게 전에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우에노 시장은 키치조지의 시장과는 그 풍경이 사뭇 달라서 과일도 채소도 생선도 펄떡펄떡 숨쉬고 있는 듯했고 절반 이상이 파장이었지만 생기가 넘쳤다. 노랗고 둥근 알전구를 내걸기 시작한 회덮밥 노점 중 나는 두 번째 집에 들어갔다. 가타카나가 펄럭이는 메뉴판을 오랫동안 째려보고 겨우 '살몬-튜나'를 읽어낸 후 얏호! 흥에 겨워 '살몬-튜나' 한 그릇을 시켰다. 연어반 참치반 회덮밥이었다. 와사비와 간장을 콕콕 찍어 김과 함께 먹는 회덮밥은 얌전히 펄떡이는 맛이 났다. 그때까지 회덮밥이라곤 하얀 생선을 길쭉길쭉 썰고 상추를 듬성듬성 찢어 빨간 초장을 휘휘 둘러 먹는 것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 일본식 회덮밥은 신세계였다. (나는 빨간 초장 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 흔한 팔도비빔면 한 그릇도 내 손으로 끓여먹은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 일본식 덮밥이 유행하기 시작하며 각종 생선이 올라간 '동'을 맛보았지만 역시 현지에서 맛보는 최초의 맛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심지어 여긴 시장, 가격도 600엔밖에 되지 않았다!



미타카의 팬케이크데이즈 팬케이크

도쿄에서 번화한 곳은 아닌 미타카에 굳이 가게 된 것은 오로지 지브리 스튜디오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오후가 될수록 사람이 몰린다는 후기 덕분에 그날 첫 일정으로 지브리스튜디오를 잡아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곳곳은 오밀조밀하고 곳곳은 방대하며 곳곳은 사랑스럽고 곳곳은 감탄이 절로 나오는 지브리 스튜디오 관람은 과연 행복했다. 조금 낡은 티가 나는 전원주택과 거대한 오두막 사이에 있을 지브리 스튜디오의 외관도 꿈을 꾸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 드디어 일본식 팬케이크를 맛보기로 했다. 마침 지브리스튜디오 근처에 평이 괜찮은 팬케이크 가게가 있단다.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이노카시라공원을 가로질러 가면 바로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관람을 마치고 잔뜩 부풀린 낭만을 한걸음 한걸음 살살 풀어 보는 기분이 상쾌했다. 어렵지 않게 찾아가 자리를 잡은 팬케이크데이즈의 팬케이크는 공을 많이 들인 수플레케이크가 아니라 주말 아침 집에서 흔히 해먹기 좋은 (또는 맥모닝으로도 손쉽게 만날 수 있는) 납작하고 동그란 팬케이크였는데 스마일 무늬가 그려져 있어 앙증맞았다. 당연히 시럽과 생크림과 딸기쨈이 곁들여 나오겠지, 달콤한 기대는 뜻밖에 연둣빛 양상추 샐러드가 함께 나오며 무너졌지만 생뚱맞아 더욱 반갑다. 덕분에 포뇨의 햄라면과 하울의 베이컨계란정식을 떠올리며 풋풋한 점심 식사를 마쳤다.



나가메구로의 파티스리포타제 야채케이크

명품을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나에게 긴자와 다이칸야마는 분명 잘못된 선택지였다. 그러나 조용하지만 기품 있고 젊은 다이칸야마를 걷던 그때의 느낌만은 오히려 세월이 지날수록 그립고 기억에 생생하다. 기억을 더욱 생생하게 하는 것은 다이칸야마의 츠타야에서 뜻도 모르고 읽었던 일본 잡지들, 하나하나 야무지게도 살펴봤던 디자인 물품들 덕분이었다. 기억을 더욱 숙성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츠타야 1층 구석 자리에서 아이스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다리도 쉬고 목도 축이며 넋놓고 바라본 복작대는 사람들의 모습 분이다. 이 휴식은 뒤의 일정을 위해 꼭 필요하기도 했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가메구로까지 부지런히 걷고 또 걷고 종내에는 관광객은 커녕 현지인들도 잘 안보이는 낯설고 한적한 골목에 도착했다. 바로 이곳의 명물 야채케이크를 맛보기 위해서였다. 파티스리포타제는 작고 깨끗하고 사람이 적은 가게였다. 분명 유명한 곳이라고 했는데 잘못 찾아왔나 살짝 겁이 날 정도였다. 해가 조금씩 길어지다 못해 노을이 되기 직전의 나른한 시간이라 그런가 싶다가도 이런 가게는 이런 나른한 시간에 더 잘 어울리지 않나, 거듭 갸우뚱을 반복하며 작고 귀여운 케이크와 쿠키들을 하나하나 뜯어 보았다. 얌전을 빼고 앉아서는 하나같이 엉뚱하기 그지없다. 우엉, 토마토, 단호박, 당근을 숨겨 놓고 시침 뚝 떼고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꼴이 재미있다. 하나하나 공들여 다 맛보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꾹 누르고 토마토와 당근 케이크만 하나씩 맛본다. 희한한 맛이 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 기우다. 일본이 베이커리 강국임을 새삼 느끼며 더 아쉬운 발걸음을 나선다. 나른함을 넘어 피곤함에 가까운 시간이다. 야채면 야채고 빵이면 빵이지 역시 야채 케이크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저녁 먹으러 가야지.




롯폰기의 하브스 크레이프

6박 7일 내내 머무를 아사쿠사의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거리를 벗어나 가장 먼저 나선 곳이 도쿄타워가 있는 롯폰기였다. 릴리 프랭키나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진 않았지만 그래도 도쿄에 왔으니 가장 먼저 도쿄타워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일본에 오면 가장 먼저 먹어야 할 것 같은 짭짤하고 풍미 넘치는 일본 라면(이치란 라멘이었는데, 1인 식당으로 유명하다.)부터 한 그릇 뚝딱 해치운 후 호기롭게 길을 나섰지만 첫날부터 밤길을 무턱대고 나서는 건 역시 좋지 않았다. 보기 좋게 길을 잃고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더 걷고 나서야 나는 도쿄타워 입구에 닿을 수 있었다. 빨간 야경은 야경다웠다. 소설을 읽고 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막상 한국에 돌아와서도 소설을 찾지 않은 걸 보면 그렇게 큰 감동을 받은 건 아닌 모양이다. 오히려 기억에 더 선명한 것은 꼭대기의 전망대가 아니라 지하 1층까지 내려와 쭈볏쭈볏 문을 열고 들어갔던 하브스 내부의 복작임과 고풍스러웠던 풍경이다. 사람들이 빈 자리 없이 빼곡이 들어 앉아 저마다 커피며 케이크를 한 접시씩 올려놓고 맛을 음미하거나 수다를 떨고 있는 그곳은 뜻밖에 조용하고 단정했다. 새삼스러운 일본스러움을 느껴보는 장면이었다. 나도 겨우 출입문 바로 옆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고 이곳의 명물인 과일 크레이프케이크 한 조각을 시켰다. 겹겹이 발린 생크림과 얇게 저미다시피 한 과일과 크레페가 묵직하면서도 화려하게 녹는 그 맛은 1시간 가까이 길을 헤매며 이거 야단났다고 당황했던 나의 여행 첫날을 겹겹이 위로해 주었다. 나는 이 크레이프를 오랫동안 잊고 또 잊지 못하고 지내다 결혼 후 첫 번째로 맞이하는 시어머님의 생신날 크레이프케이크 맛집이라는, 일본에서 유학한 파티쉐가 만든다는 베이커리에서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홀케이크로 주문해 시댁 식구들과 조각내어 나누어 먹었다. 시댁 식구들은 맛있다며 칭찬하셨지만 이 케이크를 직접 주문하고 포장해 온 나만 시무룩했다. 당연하게도 그때 나를 위로하던 그 맛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유가오카의 이름도 모를 카페에서 아이스커피 한 잔

도쿄에 온 둘쨋날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나서자마자 나는 사람들이 굳이 여름에 도쿄를 여행하려 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행의 대부분을 걸어서 소화해야 할 도쿄의 골목길은 왜 그리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이 심한지는 알 수 없었다. 특히 그때 한창 유행하던 I'm bottle 텀블러의 원산지나 다름없는 지유가오카는 자유의 언덕 아니랄까봐 구비구비 언덕길이 즐비해 있어 아침 8시부터 길을 나선 나의 열을 더욱 부채질했다. 숨을 헐떡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그렇게도 열심히 걸었건만 너무 일찍 온 탓에 아직 오픈 시간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허망하게도 지유가오카의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고 야속한 오픈 시간은 하나같이 11:00였다. 땀에 절은 머리카락 사이로 부글부글 열이 끓는다. 어디든 도망칠 곳을 찾아야 했다.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걸으며 체중이 쏠린 발은 조금씩 샌들 무늬를 따라 패이기 시작했고 발가락에서 빨간 맛이 나기 직전에 기적적으로 문이 열려 있는 가게를 발견했다. 카페다! 크지 않은 곳이라 빈자리를 찾기 어려워 나는 실례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단 하나 비어 있던 제일 너른 소파 자리를 차지했다. 디저트 천국이라는 도쿄에서 그당시 가장 핫한 곳 중 하나라는 지유가오카까지 왔지만 디저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바로 아이스커피를 한 잔 시켜 벌컥벌컥 한 잔 들이키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맡겼다.(죄송합니다. 땀이 많이 났어요.) 한국에서는 굳이 <슈만과 클라라> 카페까지 찾아가서 맛보던 부드럽고 진한 일본식 아이스커피의 풍미는 일단 모르겠다. 그저 놀라울 정도로 미지근한데 시원한 맛이었다. 도쿄 여행 내도록 커피를 마실 때마다 목이 말라 숨이 차오르기 직전의 긴박한 상황이어서 그랬을까. 나의 급박함과는 딴판으로 지유가오카의 카페도, 긴자의 도토루 카페도 왠지 모르게 고풍스런 느낌이 들었는데 짙은 갈색의 인테리어와 명도와 채도가 낮은 조용한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끓어 넘치기 직전의 열기를 식히는 고색창연에 가까운 조용함과 눈을 편안하게 하는 어두움이 가끔 그리울 때마다 나는 집안에 혼자 있을 때만을 기다려 암막커튼을 조금 치고 소파에 무릎을 껴앉고 앉아 본다.




등잔 밑이 어두워: 아사쿠사의 우유푸딩

굳이 아사쿠사에 숙소를 마련한 이유는 가장 일본색이 짙은 곳이라 짐작해서였다. 내 짐작은 빗나가지 않아서 게스트하우스를 들고 나며 만나는 아사쿠사 거리는 과연 나쁘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 옆에는 작고 아마도 아기자기할 가게 하나가 있었는데 아침 일찍 길을 나서 해가 빠지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오는 바람에 문이 열린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숙소로 돌아와 하루를 복기하고 내일 하루의 일정을 점검하며 여행 책자를 읽다 '아사쿠사의 우유푸딩 맛집'이란 문구를 보고 충격과 설렘에 빠졌다. 내가 매일 드나드는 아사쿠사에 우유푸딩 맛집이 있다니?! 알고 보니 문이 열린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 집이 우유푸딩 맛집이었다. 다행히 여행 마지막 날 츠키지 어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드디어 게스트하우스 옆집의 문이 열린 것을 확인했다. 바로 우유푸딩 하나와 말차푸딩 하나를 포장해 와 입 안에 살살 녹는 그 맛을 음미하며 온 몸이 살살 녹는 느낌과 함께 짧은 꿀잠에 빠지는 것으로 도쿄 여행을 마무리했다. 공항에서 통과만 할 수 있었더라도 한 다섯개 씩은 사올 수 있었겠지만, 허기진 아쉬움은 공항 면세점의 도쿄바나나와 로이스 생초콜릿으로 대신 채웠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도쿄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들로 실컷 배를 채우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처럼 <심야 식당>과 <카모메 식당>과 <고독한 미식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들을 볼때마다 도쿄에서의 내 모습을 회상했다. 그때의 나와 영상 속 주인공들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했다. 특히 <고독한 미식가>에 나오는 멋진 주인공 아저씨가 중년의 나이에 정장으로 한껏 점잔을 뺀 모습으로 근엄하게 혼밥을 받고서 어린아이처럼 감탄사를 연발하는 부분을 보면 아마도 그때 주위를 잔뜩 경계하는 듯했지만 어린아이처럼 헤실대고 있었을 내 모습이 그대로 오버랩된다.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도 그렇고, 서른의 나를 되돌아봐도 나는 참 대책이 없을 정도로 먹는 걸 좋아했고 그 모습이 순수하기보단 유치한 것만 같아 늘 부끄러워했다. 좋아하는 음식들은 한결같이 아이 입맛에 가까워 튀김이나 고기 등 성숙한 어른들이 피할 만한 것만 구미가 당겼다. 일행과 함께 식당으로 향할 때면 돈까스나 치킨을 먹으러 가자고 단 한 번도 먼저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부담스러워할까봐 먼저 제안하는 것도 부끄러웠다. 막상 음식을 받고 나서도 원래 먹던 대로 먹으면 너무 많이 먹어서 다른 사람이 제대로 먹지 못하는 민폐를 끼칠까 조금 배가 고플 정도로 먹는 양을 조절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햄버거나 김밥 같은 걸 사가서 위장의 남은 부분을 채우기도 했다. 



도쿄에 혼자 나설 때만 해도 이제 서른, 완전한 어른이 되었음을 느꼈었다. 해가 떠 있는 시간 내도록 씩씩하게 도쿄를 누비고 맥주와 커피를 마시며 진정한 어른의 세계에 들어온 나 자신의 모습이 몹시 뿌듯했었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뿌듯하기는커녕 영락없는 어린애다. 돈까스며 초밥이며 케이크 같은 것들을 먹겠다고 겁도 없이 이국의 한낮 땡볕을 나홀로 누비고 팬케이크의 스마일 무늬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기뻐하던, 연어와 참치를 읽어낸 스스로를 칭찬하고 길거리 한복판에서 손가락에 기름을 묻혀 가며 멘치까스를 쩝쩝대던 그 모습은 유치하다 못해 천진하다. 그리고 서른보다는 마흔에 가까운 지금도 기억 속을 누비며 군침을 다시고 오늘 저녁은 뭘 먹을지 고심하는 걸 보니 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구나 싶어 내심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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