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비 Aug 19. 2022

도쿄에서: 맛있는 혼밥(1)

추억을 건져 올리는 것은 혀끝에서 시작된다.

긴 터널 같던 스물아홉은 서른을 맞이하며 조금씩 저물어 갔다. 홀로 여행을 다녀왔던 제주도가 나의 스물아홉을 말없이 지켜보며 위로해 준 덕분이었다. 여섯 번째 담임을 하며 만난 우리반 아이들은 어딘지 어수룩하면서도 사연 많고 끼 많고 애교도 많고 성적은 바닥이라 오히려 매사 뾰족하고 까칠한 나의 긴장을 웃음으로 풀어 주었다. 아이들에게서 힘을 얻으며 교직에도 조금씩 정을 붙이기 시작했고, 기타 연주에 취미를 붙여 동호회 활동도 시작했다. 서른 특유의 원숙한 젊음이 안정감과 자신감로 나의 서른은 스물보다 훨씬 행복했다.


나는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홀로 여행을 계획했다. 극악스러운 더위 때문에 여름엔 웬만하면 가지 않으려 한다는 도쿄였다. 나는 더위에 강하지는 않았지만 젊고 튼튼했으며 일행의 체력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국인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과 죄책감 때문에 드러내놓고 즐기지는 못했지만 노래, 영화, 만화, 소설, 음식까지 10년 넘게 일본의 것들을 섭렵했었다. 덕력보다는 박학다식한 분야에 가까웠다. 가고 싶은 곳도 많았고 먹고 싶은 것도 많았다.


2014년 7월 중순에서 하순으로 넘어가는 6박 7일동안 나는 도쿄 다녀왔다. 입을 쩍 벌리게 하는 대단한 곳 아니었고 위대한 감동을 받나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 없었다. 그저 우리나라와 별 다를 것도 없지만 우리나라와는 정서부터 다른 평범한 마을과 평범한 거리를 걷고 걷고 또 걷다 배가 고프면 식당에 들러 끼니를 때우고 목이 마르면 아이스커피로 목을 축이며 먼산바라기를 할 뿐이었다.  


그러나 도쿄는 내가 다녀왔던 한 줌의 소박하지만 찬란한 여행지 중 가장 의미 있는 곳이었다. 일본의 삶과 문화에 대한 배경 지식은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넘칠 정도로 충분했으므로 평범한 도쿄를 내맘대로 걷고 보고 먹고 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일본어가 가능했기에 크게 불편하지도 않았다. 가장 다행스러웠던 것은 내가 일식을 한식 이상으로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계획하고 찾아간 식당도 우연히 들어간 카페도 평범하면 평범한대로 뛰어나면 뛰어난 대로 모두 맛있었다.


시부야의 모토무라 규카츠

결국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시부야 지하철 역을 한참 헤매다 여섯 번째인가 일곱 번째인가 도전하듯 빠져나온 출구 앞에는 고가도로 시작점이 펼쳐져 있었다. 긴긴 도쿄의 여름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시간, 고가도로 가로등이 하나 둘 불을 밝힌다. 덜컥 겁이 나고 막막하다. 여행 책자를 살펴보니 웬걸 이 길이 맞는 것 같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어둠과 겁을 꼭꼭 누르며 골목을 찾아 들어간다. 지하로 연결된 좁은 입구와 사람줄과 나무 입간판! 모토무라 규카츠. 메뉴는 크게 4~5가지인데 규카츠에 어떤 것을 추가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도로로(참마를 간 것)를 얹은 밥이 함께 나오는 2번 세트는 결국 포기하고 기본 1번 세트 하나를 시켰다. 나는 고기도 좋아하고 회도 좋아하고 돈까스도 좋아하는데 이때 처음 맛본 규카츠는 내가 좋아하는 이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바삭바삭하고 야들야들하고 사르르한 감칠맛. 규카츠를 제일 먼저 언급하는 이유는 여기까지 오는데 길을 엄청나게 헤멨거나 한 시간 남짓 줄을 섰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당연히 제일 맛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야 드는 생각인데 도로로를 얹은 밥을 함께 시켰어야 했다. 작품마다 맛깔나는 것들이 즐비한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시리즈 소설에서 도로로를 얹은 밥이 나오는 구절을 한 다섯 번은 마주쳤기 때문이다.


신주쿠의 돈친칸 돈카츠

신주쿠는 명성에 비하면 생각보다 길을 찾기 쉬웠다. 거대한 건물들이 즐비한 샐러리맨들의 서식지 같은 곳이기도 했고 시부야의 극악스러운 지하철 역과 거리의 인파에 비하면 제법 점잖은 모습이었다. 도쿄에서의 마지막 밤을 앞두고 도쿄도청 45층에서 야경을 보기 위해 신주쿠에 들른 김에 저녁 먹을 만한 곳을 찾다 신주쿠 돈츠 맛집이라는 돈친칸으로 향했다. 입천장이 다 까질 정도로 바삭한 튀김옷, 12호 반지를 끼는 내 손가락 한 마디보다 더 두꺼운 고기, 푸짐하게 쌓아 올린 양배추, 평범한 갈색 소스, 몽글몽글 미소된장국과 밥. 도쿄 여행이 끝나기 전에 드디어 전형적인 일본 돈까스를 만다. 한국으로 치면 기사식당에서 김치찌개와 제육볶음 정식을 먹은 기분이 이럴까?


에비스의 키무카츠 25겹까스

에비스 맥주기념관에 가는 김에 뭘 먹을까 찾아보다 25겹 돈까스라는 키무카츠로 결정했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내려앉은 정오 무렵이라 길가에 사람이 거의 없었던 덕분에 대기 없이 바로 자리를 잡고 파들파들한 더운 김을 식힐 수 있었다. 마늘, 양파 등 여러 가지가 변주된 25겹 돈카츠를 팔고 있으나 혼밥의 유일한 단점이 바로 선택의 폭이 좁다는 것이라 아쉬움을 뒤로하고 기본 25겹 돈카츠를 주문했다. 색다르긴 하지만 얇은 고기를 겹겹이 올려 튀긴 돈카츠라 그런지 육즙과 풍미가 살짝 떨어진다. 오히려 만족스러웠던 쪽은 함께 주문한 에비스 맥주였다. 기린, 아사히가 지닌 일본 맥주 특유의 청량함보다는 좀 더 묵직하고 풍미가 있다고 해야 하나? 미식가가 아니라서 입맛에 영 자신은 없지만 본 맥주보다는 유럽 맥주 같다. 25겹까츠도 에비스 맥주도 내가 알고 있는 일본의 맛과는 색다르다. 두둑하게 점심을 먹고 살짝 취기를 느끼며 아사히 맥주 박물관에 잘 다녀오긴 했는데 금 더 기억에 생생한건 오며 가며 지났던 에비스의 쇼핑몰 아케이드와 그곳을 왕복하며 느꼈던 더위와 취기다.


키치조지 시장의 멘치카츠

미타카의 지브리 스튜디오를 관람하고 팬케이크로 점심을 먹긴 했지만 돌아서니 출출하다. 마침 미타카 바로 옆 키치조지에 멘치카츠 맛집이 있다길래 겸사겸사 키치조지로 넘어갔다. 멘치카스 가게는 키치조지 시장 한복판에 있었다. 도착하기도 전에 긴 줄을 보고 여기구만, 짐작했고 역시나 맞다. 내 바로 앞에는 아마 현지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서 계신다. 내 모습이 아무래도 낯설어 보였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고 물어보길래 솔직하게 한국에서 혼자 여행 왔다고 말했다. 여자 혼자 여기까지 왔다니 대단하다며, 한국 어디서 온 거냐며, 이 가게가 유명하고 맛도 좋은데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고 알뜰살뜰 물어보시더니 도쿄가 치안이 괜찮긴 하지만 그래도 위험할 수도 있다며 밤에는 외출을 조심하라고 걱정까지 잊지 않으셨다. 국적 불문하고 할머니들은 어쩔 수 없이 어린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가 보다. 혼자 여행을 다니다 보니 이런 대화가 불편한 관심이라기보단 오히려 즐거운 추억 한 구절이 된다. 그리고 붕어빵 봉지에 담아주는 멘치카츠는 역시나 맛있었다. 기름 듬뿍, 바삭 듬뿍, 부드러움 듬뿍, 고기 특유의 고소함 듬뿍! 시장에 온 김에 보세 옷가게에 들러 한국에서도 잘 안 사는 옷 실컷 샀다. 시부야, 시모키타자와, 하라주쿠에서는 손수건 한 장 안 샀는데 역시 나는 번화가보단 변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아니면 멘치카츠 덕분일 것이다.


긴자의 미도리스시

일본에 왔으니 스시는 한 번 먹어야 하는데 어디서 먹나 하다가 일본의 명품거리인 긴자에서 갈만한 곳이 없어 택하게 된 곳이 미도리스시이다. 기본 모둠 스시 하나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옆 테이블에서 딸과 손자와 함께 온 듯한 할머니가 혼밥을 하려는 내 모습이 신기했는지 어떻게 혼자 오게 되었느냐고 (키치조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먼저 말을 건다. 한국에서 혼자 여행왔다고 흔쾌히 대답했다. 할머니는 몹시 놀라고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묻다 스시는 잘 주문했는지 물으셔서 그렇다고 했더니 바로 직원을 불러 내 주문이 들어갔는지 확인하신다. 알고 보니 진짜 주문이 안 들어가 있었고 할머니께서 다시 주문해주신 덕분에 나는 무사히 모둠스시를 받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으셨다면 나는 속절없이 인종차별에 가까운 외국인 냉대의 피해자가 되었을까? 당시 내 나이보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였던 딸과 어린 손자를 챙기며 옆 테이블에 혼자 앉아 절은 땀을 식히고 있던 나도 알뜰살뜰 챙겨 주신 할머니, 감사합니다.


츠키지 어시장의 오마카세 스시

마지막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후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 오전이 비는데 뭘 할까 고심하다 새벽부터 사람들이 줄을 선다는 츠키지 어시장으로 정했다. 어시장을 구경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순전히 츠키지 어시장의 스시를 먹기 위해서였다. 새벽 다섯 시에 줄을 서면 대기 한 시간, 여섯 시에 줄을 서면 대기 두 시간이래서 다섯 시에 도착하고 싶었지만 아침보다 밤에 가까운 새벽에 길을 나서는 게 무섭기도 하고 졸리기도 해서 적당히 다섯 시 반쯤 도착하도록 내 마음끼리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새벽 다섯 시 사십 분에 츠키지 어시장에 도착했을 땐 활기 넘치는 시장 상인들의 모습이 꼭 나를 응원하듯 맞이하는 것 같았으나 결국 나는 두 시간 이십 분 정도 줄을 서고 졸음과 피로함과 지루함에 인내가 막 끊어지려 할 때가 되어서야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초밥 장인이 왜 시장 안에서 초밥을 팔고 있지? 의아스러웠지만 다찌에 앉은 외국인과 현지인과 나는 초밥 장인이 하나하나 내어주는 초밥을 사진 찍고 입에 넣고 사르르 녹이며 맛있다를 연발했다. 줄을 서 기다리던 시간도 하나하나 내어주는 초밥도 순식간에 삭제하고 초밥 장인과 사진도 한 장 찍은 후 다시 아사쿠사의 숙소로 돌아와 30분 정도 꿀잠을 자고 체크아웃했다. 츠키지라는 지명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얼간이>에서 다시 만났으며, 츠키지 어시장의 스시는 대구의 스시민종우, 스시해리, 스시노토시, 굿또스시(전부 스시 오마카세 가게)까지 다녀오고 나서야 떠올랐다. 샤넬 오픈런은 꿈도 못 꾸던 내가 새벽 줄서기라는 장벽을 이겨내고 맛보았던 츠키지 어시장의 스시가 바로 오마카세 스시였구나! 어쩐지 뭔가 좀 다르더라니. 서당 풍월부터 맛있는 음식까지 무엇이든 역시 경험은 중요하다.





                                                                              쿄에서: 맛있는 혼밥(2)로 이어집니다.


도쿄에서: 맛있는 도쿄에서: 맛있는 혼밥(1)혼밥(1)

이전 01화 제주도에서 만난 국수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