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지 않았던 순간의 맛
나의 스물아홉은 지리멸렬했고 외로웠다. 첫 학교에서 관리자의 갑질과 업무 폭탄으로 마음의 상처를 안고 두 번째 학교로 옮긴 해였다. 새 학교의 교무실 분위기와 학급 분위기는 냉랭했다. 이미 학교에 정나미가 떨어져 마음을 닫았던 나의 새 학교살이는 재미없다 못해 무미건조했다. 이전 학교에 비해 업무며 수업이 가벼워 빈 시간이 많았지만 손을 놓은 채 무의미한 하루를 흘려 보냈다. 집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학교가 있어 4시 반이면 집에 도착할 수 있었고 문화센터에서 천연비누와 화장품 만들기, 캘리그래피, 필라테스를 배우며 남은 일과를 때웠지만 큰 재미는 없었다. 몇 안 되는 친구들도 20대의 과업인 일과 사랑에 치여 만나기 쉽지 않았다. 일은 되었고 사랑이라도 어찌 해 보겠다며 소개팅이나 맞선에 나섰지만 좀처럼 이렇다 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대학원을 수료했지만 논문은 결국 완성은 커녕 시작도 하지 못했고 승진은 깨끗하게 포기했으므로 간절하지도 않았다.
새 학교의 개교기념일은 9월 30일이었다. 개천절과 주말과 나란히 닿아 날씨가 한창 좋을 때에 4일의 연휴가 생겼다. 조금씩 반짝거리기 시작하는 초가을 날씨는 나의 하루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반짝이는 가을 날씨보다 더 반짝일 스물아홉에 늦가을처럼 쓸쓸한 내가 불쌍했고 답답했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지만 사람을 모으고 일정을 조율할 열정은 없었으므로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한 장만 결재했다. 한 장만 결재하고 나니 또 겁이 나서 렌트카며 게스트하우스며 줄줄이 결재를 하려는데 개교기념일이 근무 순번이란다. 메시지를 받고 뭘 해도 안 되는 나를 실컷 비웃다 약이 올랐다. 마침 추석 전전날 재량휴업일 근무가 걸린 다른 선생님이 애써 구한 귀성길 기차표를 날리게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근무일을 맞교환하자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고 우린 서로의 비행기와 기차 티켓을 사수할 수 있었다.
제주도는 2년 전 유럽여행을 함께 다녀왔던 언니들(삿포로 여행까지 함께 했던 멤버로, 첫 학교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다.)과 처음 가 본 곳으로, 나는 이때 비행기라는 것을 처음 타 봤다. 그때 나에게 가장 여운이 많이 남았던 곳이 용눈이오름이었다. 더 걷고 싶었지만 더 화려한 곳이 많았으므로 아쉬움만 간직하고 있던 오름부터 걸으리라, 홀로 비행기에 오르며 생각했다. 스물아홉을 지나는 동안 스물아홉만이 가질 수 있는 좋은 점이 딱 하나 있었는데, 눈이 밝고 다리가 튼튼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거칠 것 없이 3박 4일 내내 운전하고 걷기만을 반복할 수 있었다. 용눈이오름, 아부오름, 산굼부리, 절물오름을 열심히 걷고 안도 다다오와 이타미 준의 건축물을 보겠다며 열심히 렌트한 마티즈를 운전했으며 우도에 도착해서는 분홍 스쿠터를 빌려 해안선을 따라 3시간 남짓 달리기만 했다. 명상도 감상도 성찰도 없이 그저 걷고 달릴 뿐이었다.
오름들이 즐비한 중산간 한가운데 교래라는 마을이 있다. 닭칼국수가 함께 따라 붙는 마을이다. 오전에 용눈이오름과 아부오름을 오르고 나니 허기와 한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안개가 자욱해 비인지 안개인지 구름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뺨 옆에 바싹 붙어 떠다닌다. 즐비한 닭칼국수집 중 어디를 가야 할지 고르지 못해 여행 책자가 시키는 대로 식당 문을 열었더니 점심 시간을 조금 넘긴 때라 손님은 듬성듬성, 온통 미처 치우지 못한 먹고 남은 테이블 투성이다. 나혼자 여행은 처음이라 아직 혼밥에 익숙지 않았던 나는 몹시 쭈볏거리며 빈 테이블을 찾아 앉았다. 4인 테이블뿐이라 자리를 많이 차지한 것도 아닌데 괜히 주눅이 든다. 서빙하시는 아주머니는 친절하지는 않지만 불편하지도 않은 기색으로 물병과 컵을 줬다. 메뉴를 고를 것 없이 닭칼국수 한그릇을 주문했고 끈적한 습기에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한 젓가락 들었다.
놀랍게도 별 맛이 없다. 물에 젖은 닭고기에 밀가루 칼국수니 별 맛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전 내도록 흙길을 걸었고 비안개 속을 뚫고 운전하느라 끙끙 앓다시피 했다. 더군다나 비오는 날 바로 내온 칼국수가 맛이 없다니, 이건 음식이 문제가 아니라 입맛이 없는 내 문제다. 이 정도로 사는 것이 재미 없었구나. 달지도 쓰지도 않은 입맛을 억지로 다시며 막걸리 생각도 간절하고 소주 생각도 간절했으며 눈물도 간절하게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후루룩 후루룩 국수를 넘긴다. 한 끼 정도는 대충 때워도 될 것을 혼자 여행을 한다는 것이 무섭고 두려워 꾸역꾸역 한 그릇을 다 비운다. 울렁이는 것은 위장이 아니라 심장이다. 식당을 나서니 비는 옅은 안개가 되어 있었다. 축축한 몸으로 축축한 땅을 묵묵히 밟으며 산굼부리도 한 바퀴 돌고 절물오름도 완주했다. 교래의 닭칼국수가 어떤 맛이었는지는 그날로 기억 속에서 사라졌으며 제주도 여행 내도록 입맛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은 이타미 준의 건축물인 방주교회와 포도호텔을 보러 길을 나섰다. 방주교회(노아의 그 방주가 맞다.)에 들렀을 때는 의도치 않게 오전 예배 시간이라 사람들의 기세에 휩쓸려 그만 예배당에서 주님께 기도를 올리고 찬송가도 네 곡이나 따라 불렀으며 방주교회 신도 OOO씨의 안녕과 쾌유를 기원한 후 네모나고 따뜻한 떡을 하나 받아 나왔다.(나는 무교다.) 제주도의 날씨는 변덕스럽다 못해 호사스럽기까지 했는데, 방주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만 해도 창 너머로 스미는 햇살이 몹시 아름답고 따스하였으나 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본격적으로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지긋지긋한 비안개가 다시 사르륵 뺨을 스치기 시작한다. 안개가 더 짙어지기 전 포도호텔에 도착했다. 호텔같지 않은 단층 건물의 갈색 내벽과 짙은 양탄자와 안개처럼 스미는 포도 향기가 낯설고 아름다우며 신선했다. 나는 이 호텔의 1층 식당에서 점심으로 우동 한 그릇을 시켰다. 9년 전 물가로 우동 한 그릇에 19000원이었으니 호사스럽다 못해 사치스러운 우동 한 그릇이었다. 날씨와 시간 덕분에 나는 손님이 거의 없는 식당 창가 테이블에 앉아 나즈막한 중산간의 풍경을 바라보며 우동을 기다릴 수 있었다. 과연 입소문대로 쫄깃한 면은 맛있었고 새우튀김도 탱탱했지만, 그토록 먹을 것을 좋아하는 나였지만, 나는 기쁘지도 즐겁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며 국숫가락을 삼킬 뿐이었다.
용눈이 오름의 아름다운 곡선과 아부 오름의 신비로운 숲과 절물 오름의 싱그러운 풀향기와 이타미 준의 방주교회와 포도호텔과 안도 다다오의 본태 박물관과 눈부시게 화창했던 우도의 들판과 바다를 모두 뒤로하고 이 여행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교래 닭칼국수과 포도호텔의 우동 한 그릇이다. 무심한 탁자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그 한 그릇들이다. 외롭고 쓸쓸한 한 그릇들을 위로해 주는 소줏잔 하나 없는 오롯한 한 그릇들이다. 그것들은 스물 아홉의 고독과 외로움과 지독히 불안한 나의 현재였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지 않았던 순간의 맛을 인식할 수 없고 기억할 수 없고 추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제주도에서 만난 국수들 중 기억에 남는 맛은 그로부터 2년 뒤, 예의 그 언니들과 다시 들렀던 겨울 제주도의 산방식당에서 맛보았던 밀면의 맛이다. 경주나 부산 밀면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던 나는 산방식당의 밀면도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여기는 다음에 꼭 와야 겠다고 내심 다짐했을 정도로 맛있었다. 점심을 거르고 4시가 다 되어 끼니를 때워서 맛있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별로 앉고 싶지 않아 하는 가운데 테이블에 혼자 앉아 수육 100g과 소주를 한 잔 시켜 맛깔나게 자시고 계시던 동네 할아버지의 모습이 훌륭한 안주가 되어서 맛있었을 수도 있다. 밀면과 수육(고기의 질감이 느껴지면서도 살살 녹았다.)으로 배를 든든히 채운 후 우리들은 송악산 둘레길을 조금만 걷기로 했다. 타고나길 성격이 급한 나는 자연히 혼자 떨어져 앞서가기 시작했다. 셋이 함께 하는 여행에서는 자연히 둘과 하나로 나뉠 수밖에 없는데, 나는 이 여행에서 대체로 하나 쪽이었다. 먼저 높은 곳에 올라가 만끽하는 겨울의 갈대밭과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산방산의 찬란한 자태와 반짝이는 파란 바다는 장관이었다. 셋 중 하나가 되었으니 자연히 외로웠지만 불안하지 않았고 스물아홉의 제주도에서 즐기지 못했던 고독을 이제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이제는 결혼을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혼자가 되어 외로워도 고통스럽지 않았고, 이미 혼밥을 맛있게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맛있는 혼밥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스물 아홉의 내가 제주도로 향했던 이후로 꼭 3년 뒤의 그날, 마찬가지로 개교기념을 낀 3박 4일간 나는 가족들과 함께 결혼 전 마지막 가족 여행으로 제주도를 다녀왔다. 상견례를 마치고 예식장까지 예약한 뒤였다. 아침 비행기를 타고 내려 이른 점심으로 선택한 곳이 바로 고기국숫집이었다. 본격적인 점심시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가게 앞에 진을 친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보며 잔뜩 기대를 한 데다 대기 시간이 길었기 때문인지 무척 맛있었다. 진한 국물도 보들보들한 고기도 알맞게 간이 밴 국수도 맛있었고 이만하면 타이페이의 우육면과도 조금은 견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리며 식당 밖으로 나오는데 아버지가 뭐 이런 데를 기다리면서까지 먹겠다고 사람이 몰리냐며 툴툴거린다. 엄마는 어색하게 웃으며 맛이 없는 건아닌데, 서문시장의 수제비와 잔치국수 같은 거냐고 나에게 질문한다. (서문시장의 수제비와 잔치국수는 명물이긴 하지만 맛보단 가성비와 특유의 옛날 정서로 통하는 명물이다.)
아 그래? 난 제주도에서 먹은 국수 중에 이게 젤 맛있었는데 희한하네? 불안하다 못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았던 외로움과 고독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혼자가 되어도 괜찮을 시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앞두고 가족들과 함께 추억을 먹는 그 맛이 바로 제주의 고기국수 맛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