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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Sep 20. 2022

사랑은 사진을 타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한다는 건

아이가 아프다. 열이 나고 가래가 심해 코로나에 재감염된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 아니었다. 그런데 일주일 내도록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이가 아프기 직전에 나도 배탈이 심하게 났었다. 아직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밤새 열보초를 서고 학교에서는 수업만 겨우 소화하고 열흘 동안 조퇴를 하면서 밀린 일을 급하게 처리하다 보니 아슬아슬할 정도로 방전되기 직전이다. 오늘도 핸드폰 알람을 끄려고 무거운 눈을 겨우 뜨는데 카톡 메시지가 와 있다. 어젯밤 내가 한창 잠든 시간에 남편이 보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진이라며 보낸 것은 칠 년 전, 서른 한 살 때의 내 셀카 사진이었다. 앞머리를 길게 내리고 긴 머리카락을 높이 틀어올려 둥글게 묶었다. 배경을 보니 오사카 쿠로몬 시장이다. 



추석과 개천절과 한글날이 이어지고 날씨가 화창하다 못해 화려할 9월 말~10월 초 연휴를 어떻게 보낼까 하다가 마침 옆 학교에서 근무 중이던 대학 동기 H를 꼬셔 도착한 곳이 바로 오사카였다. 우리는 오사카 쿠로몬 시장 근처의 에어비엔비에 짐을 풀었다. 중심가인 도톤보리와 신사이바시에서 도보 10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날씨도 워낙 좋고 둘 다 걷는 것도 좋아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에어비앤비 숙소(아파트에 가까운 빌라였다.) 바로 옆에 쿠로몬 시장이 있어 오며 가며 먹을거리를 사거나 구경하기 좋겠다며 둘 다 반색했다. 



짐을 풀자마자 우리는 곧장 늦은 저녁을 해결할 겸 쿠로몬 시장 안에 있다는 <천지인라멘> 가게로 향했다. 일본에 왔으니 첫 끼로 정통 라멘을 먹겠다며 갔으나 안타깝게도 이 식당의 시그니처 메뉴는 부타동(돼지고기 덮밥)과 츠케멘(국물 없는 냉라면)이었다. 설렘 반 아쉬움 반으로 부타동 하나와 츠케멘 하나를 주문했다. 식당 주인의 추천을 고분고분 잘 들은 보람이 있어 부타동도 츠케멘도 나오는 때깔부터 남달랐다. 나보다 더 사진 촬영에 진심이었던 H는 바로 아이폰을 들어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나도 질세라 열심히 갤럭시S를 꺼내 요리 조리 돌려가며 사진을 찍는다. 핸드폰 기종이 다르니 자연히 같은 사진을 찍어도 느낌이 다르다. 내가 보기엔 H의 사진이 살짝 더 때깔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내 핸드폰을 슬쩍 보더니, 느낌이 다르니 서로 사진을 공유하면 좋겠다는 아주 현명한 의견을 내놓았다. 우린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그날 찍었던 모든 사진을 부지런히 카카오톡에 실어 보냈다. 나는 스무 장 가까운 부타동 사진을 하나하나뜯어본 후 제일 때깔 좋아 보이는 사진을 카카오스토리에 올렸다. 



맛있다는 댓글을 단 사람은 기타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지인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카톡 메시지가 왔다. 어디서 뭘 먹고 있는 중인지 묻는 그의 메시지에 오사카 쿠로몬 시장에서 부타동을 먹고 있다고 답장했다. 그는 부타동을 직접 맛본 적도 없지만 완전히 자기 취향의 음식이라며 나를 몹시 부러워했다. 핸드폰을 열고 다다다다 카톡을 주고 받는 나를 지켜 보던 H가 누군지 물었다. 그냥 아는 사람. 나보다 세 살 많으니까 오빤가? 빙긋 웃는 H의 표정이 살짝 묘해 보여 그런 거 아니라고 바로 해명을 했다. 정말 그런 건 아니었지만, 오사카에서 맛난 거 많이 먹어서 좋겠다고 맛있는 사진 많이 보내달란 그의 요청에 나는 정성껏 응했다. 



여행 내내 사진에 진심인 H와 함께 하며 나는 예쁜 사진을 많이 건질 수 있어 무척 기뻤다. 그리고 숙소에 돌아오면 우리 둘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카톡으로 사진을 교환했다. 주고 받은 사진을 감상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륵 잠이 들었다. 나는 사진 더미를 고르고 골라 그에게 몇 장을 보냈다. 음식 사진도 보냈다가 풍경 사진도 보내고, 종내에는 풍경 가운데 서 있는 내 사진도 보냈다. 우리는 정말 그런 게 아니었으므로 그는 순수하게 나의 오사카 여행을 부러워했다. 적당히 맞장구도 쳐 주었고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도 역시 부타동이 제일 맛있어 보인다는 평도 잊지 않았다.



기타 동호회 활동을 같이 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와 결코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합주를 해 보거나 다른 지인들과 만나 술자리를 같이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오사카 여행을 다녀오며 H보다 그와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이후 그에게서 몇 번 전화가 왔고 동호회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느라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러다 다른 사람들과 섞여 연습실 밖에서도 몇 번 만났다. 사람들과 섞여 가을 단풍도 함께 구경하고 밤늦게까지 뒷풀이도 함께 했다. 새벽이 다 되어 택시를 타고 귀가하려는데 그가 자기 집으로 가는 길에 우리 집이 있다며 자기 차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길은 달랐다.) 아무리 가는 길이라지만 늦은 시간에 집 앞까지 데려다 준 게 고마워 술을 한 번 샀더니 그가 다음에 밥을 샀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고백했고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우리는 굳이 부타동을 먹으러 가진 않았지만,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레스토랑에서 고기도 썰었고 와인 잔도 돌렸으며 한 시간 가까이 줄을 서 맛집 탐방도 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라면 허름한 떡볶이집에서 먹는 싸구려 밀떡도 그저 쫀득쫀득한 진미였고 연탄불 앞에 쪼그려 앉아 그가 만들어 주는 달고나가 혀끝에 쪽쪽 붙는 감촉은 달콤하기 그지 없었다.



결혼을 하고 삼시세끼를 함께 하면서 나는 그와 입맛이 전혀 다르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는 부먹, 나는 찍먹. 그는 고기육수, 나는 해물육수. 그는 칼국수, 나는 쌀국수. 그는 돼지불고기, 나는 소불고기. 그는 돼지국밥, 나는 곰탕. 그는 초장, 나는 간장. 어쩌면 이렇게도 입맛이 다른 사람과 어떻게 먹는 걸로 접점이 닿아 평생을 함께 꾸려가게 된 건지 지금 생각해도 알다가도 모를 지경이다. 이런 이야기를 늘여놓으면 원래도 말이 없는 남편은 그저 웃기만 한다. 남의 부타동 사진만 보고도 맛있겠다고 하더니 나도 잊고 있던 내 셀카를 여태껏 쥐고 있어 이렇게 인연이 닿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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