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적이지 않은 오키나와 요리와 시원한 맥주 한 잔
2017년 추위가 절정인 정월 대보름날 우리는 결혼식을 올린 후 더 추운 프라하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봄과 함께 맞이한 따뜻한 신혼을 만끽하며 우리는 여름 휴가를 계획했다. 고심 끝에 3박 4일의 짧은 일정 동안 해외여행이 가능한 오키나와를 택했으나 살인적인 오키나와의 성수기 물가 때문에 풀빌라나 호텔 수영장을 즐길 수는 없었다. 남북으로 주요 관광지가 길게 뻗어 있는 오키나와의 지형을 고려해 한중간의 소도시 나고에서 2박, 공항 근처의 나하에서 1박으로 비즈니스호텔을 예약했다.
SBS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 나왔던 만좌모와 오션타워 전망대를 돌아보고 나고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져 있었다. 짐을 풀기 무섭게 우리는 나란히 손을 잡고 스테이크 가게로 나섰다. 걸어서 20분 남짓한 거리였다. 거기서 술을 곁들인 저녁 식사 후 호텔로 걸어오며 소화를 시키기로 했다. 가는 길은 전형적인 시골 거리로,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되어 있지 않고 상가도 주택가도 없어 어두웠다. 우리는 차들을 스치며 말없이 걸었다. 남편은 굳이 나를 길 안쪽으로, 저는 차도 쪽으로 자리를 바꾸어 서서 걸었다.
무사히 스테이크 가게에 도착했는데 기시감이 들었다. 바글바글한 사람들까지 아웃백과 똑 닮았다. 우리는 곧 어두운 조명과 비좁은 2인용 테이블도 아웃백스러운 자리에 안내받은 후 걸어서 이곳에 온 우리의 선택을 칭찬하며 스테이크와 맥주를 배터지게 먹었다. 오키나와는 일찍이 미군 부대가 들어온 곳으로 일본 특유의 화려한 음식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원래 오키나와가 회나 초밥보다는 참프루(오키나와식 볶음요리) 먹는 곳 아니냐, 뭘 모르면 아는 맛이 최고다, 역시 스테이크는 옳았다며 우리는 쏟아지는 일본어 속에서 대화를 만끽하기 시작했다.
동호회에서 지인들과 섞여 얼굴을 익혀왔던 남편과 처음 단둘이 만나 삼겹살집, 호프집, 소줏집으로 자리를 옮겨 가며 술잔을 기울이던 때와 비슷했다. 우리는 서로 대화가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둘 다 관심사도 맞지 않았고 말수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적당히 술을 마시고 적당한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렇게 재미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푸근해졌다.
음식과 대화가 모두 동난 후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총총했다. 남편은 내가 마음껏 별을 보도록 손을 꼭 잡으며 맞은 편에서 등 뒤에서 차가 오는지를 내내 주시했다. 하늘 좀 봐! 라는 나의 외침에 두어 번 하늘을 올려다보고 와, 탄식했을 뿐이다. 오키나와의 밤하늘이 얼마나 아름답고 별은 또 얼마나 총총했는지 가끔 이야기할 때면 남편은 기억을 더듬으며 웃겠지만 살짝 술에 취한 내가 얼마나 즐거운 마음으로 호텔로 돌아갔는지는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튿날엔 민나 섬에서 스노쿨링과 해수욕을 실컷 즐기고 수평선 너머 일몰까진 본 후 바닷바람을 잔뜩 머금으며 호텔로 돌아왔다. 우리는 늦은 저녁을 먹으려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5분 정도 걸었을까, 다행히 이자카야를 찾았다. 시골스러운 실내에 한국인 없이 왁자지껄하고 좁은 곳이었다. 테이블마다 자리 잡은 일본인 아저씨들을 보며 제대로 찾아왔다고 확신했다. 메뉴판에 사진이 있어 우리는 자신 있게 생선구이, 두부조림, 닭고기꼬치와 오키나와 지역 맥주인 오리온 생맥주를 시켰다. 그리고 꽤 붉어진 얼굴로 어제보다 더 밀착한 대화를 나누었다. 비록 풀빌라나 호텔 수영장은 아니었지만, 원했던 물놀이도 실컷 했고 예쁜 일몰도 본 후 호텔로 돌아온 터라 이야깃거리가 많았고 이제 여행의 절반 이상을 지났으니 여행 후에 관한 이야기도 필요했다.
배가 불러 음식을 더 먹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가게 문을 나섰을 때의 모습은 전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시원한 밤바람과 어둡지만 반짝이는 여름밤은 더욱 아름다웠다. 우리는 지금, 여기만이 주는 완벽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마주 쥔 손을 크게 흔들며 나는 콧노래를 불렀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남편은 언제나 그랬듯 가만히 노랫소리를 듣고 있었다. 소리 없이 웃기도 했다.
마지막 날엔 공항 근처인 나하의 밤거리를 부지런히 쏘다녔다. 남편은 내가 충동 구매한 기념품과 과자를 주렁주렁 달고 나를 따라다녔다. 우리는 일본에서도 맛이 없기로 이름난 오키나와의 초밥을 맛있게 먹었다. 오키나와에 다녀온 후 여름은 빠르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금요일 퇴근 후 놀이공원에 가서 시시한 귀신의 집 구경도 하고 속이 울렁거리도록 놀이기구도 타고, 열대야에도 사람이 바글바글한 막창집에서 막창도 구웠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던 날, 예상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아이가 찾아왔다. 다시 없을 오키나와에서의 여름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라는 열매를 맺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