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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Sep 23. 2022

나의 작고 아늑한 역사: 경주

나도 그리고 나만의 맛집 목록

내가 사는 대구에서 한 시간 남짓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경주는 원래도 전국구의 관광지였지만 라떼만 해도 관광지보다는 역사유적지에 가까운 곳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나, 직접 여행을 다녀온 후 기행문을 써 오라는 국어 수행평가 때문에 친구들과 난생 처음 대구를 벗어나 당일치기 기차여행을 다녀온 곳이기도 했다. 부모님과 함께 몇 차례나 다녀온 곳이기도 했고 남편(또는 남자친구)과 데이트를 다녀온 곳이기도 했으며 학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전일제 체험활동(=소풍)을 다녀온 곳이기도 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친숙한 곳이지만, 동생이 처음 취업을 하고 2년간 다니던 회사가 또 경주에 있어 내 일상의 귀퉁이에도 잠시 머물렀던 곳이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도 경주는 여전히 매력적인 곳이었다. 놀이동산, 공원, 들판, 키즈펜션,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 잘 갖추어진 호텔까지. 가고 가고 또 가도 경주는 여기에 또 새로운 곳이 있다며 나를 이끌었다. 감성 충만한 황리단길과 그에 딸린 핫플레이스를 거느리고 리뉴얼한 호텔과 안그래도 예쁜 명소까지 제대로 정비하여 명실공히 전국구의 관광지가 된 경주는 나뿐만이 아니라 전국민을 이끌었다. 나는 그동안 나만 알고 있던 좋은 곳을 전국민과 함께 알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쉬운 마음만 들면 좋겠지만 이제 경주는 늘 미어 터지는 인파를 어떻게 피해야 하냐는 실질적인 고민도 함께 안고 떠나야 하는 으리으리한 곳이 되었다. 거기에 아이든 부모님이든 항상 가족들과 함께하는 곳이 되어 경주에 가면 맛집을 탐방하는 것을 오히려 피하게 된다. 그래도 여행은 여행인지라 기왕이면 맛있는 거 먹으면 좋잖아. 경주에 가면 어디 가서 한 끼를 야무지게 때워야 하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오릉 앞 교리김밥 본점에서 선선한 가을 바람과 함께 미니 피크닉 즐기기

교리김밥을 처음 갔을 때만 해도 교촌마을 앞에 차를 대고 안으로 들어가서 어마무지하게 줄을 서야만 했다. 이제는 체인점도 여러 군데 생겼고 본점은 오릉 앞으로 이사해 번듯하게 자리 잡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주차장이 넓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오릉 앞으로 이사를 가고 나서는 교리김밥 내 주차장에 차를 대도 되고, 오릉 주차장에 차를 대도 되니 주차 스트레스는 크게 없다. 작년 가을 우리 세 식구는 경주에 도착하자마자 오릉 앞에 차를 대고 교리김밥 본점에 줄을 서 김밥 여섯 줄을 포장해 왔다. 오릉 주차장을 따라 나무가 심어진 긴 공터에는 간단한 운동기구와 벤치가 다문다문 서 있고, 나무 그늘도 그럴듯해 우린 바로 트렁크에서 테이블과 캠핑의자를 꺼내 벤치 앞에 자리를 잡고 포장해 온 교리김밥을 열어 점심을 해결했다. 눈 앞에 보이는 노란 논밭은 김밥 속 계란 지단을 닮아 더 예쁘다. 푸른 하늘과 선선한 바람은 덤이다. 오릉 관람은 유모차 없이 여행을 따라 나선 네살 딸아이에게 덤이 아닌 짐이 될 것 같아 패스했다.




경주 no.1 맛집인 줄도 모르고 재수 좋게 즐겼던 함양집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웨이팅 없이 들어가 한우물회를 먹을 수 있었을까? 그때는 황리단길이 이제 막 뜨기 시작하던 2016년이었고 평일이었고 오후 네 시 근처의 끼니 사이였기 때문이다. 이후 우리는 몇 번이고 함양집 방문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토요일 아침 8시쯤 가면 괜찮을 줄 알았지만 보문점은 주차부터가 난관이었고 이미 50팀 이상의 대기가 걸려 있었다. 그래도 보문점보다 한산한 곳에 있고 가게도 더 큰 보불점(내가 성공했던 곳이 여기였다)으로 발길을 옮겨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웨이팅이 길어도 너무 길어서 간혹 후기를 보면 그 정도로 기다릴 맛인가?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한 번은 먹을 만하다. 한우(육회)물회라는 메뉴 자체도 생소할 뿐더러 특유의 감칠맛과 새콤달콤함과 신선함이 있다. 함양집의 시그니처 메뉴인 이 한우물회를 표방한 다른 떡갈비 정식 집에서도 물론 접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한 번은 꼭 가볼 만하다. 부디 내가 평일에 시간을 내어 들를 수 있을 때까지 많이 번성해 주세요.




심심하지 않은, 백석 시의 슴슴함이 딱 어울리는 곳이 바로 여기당!

백석의 시를 읽다가 '슴슴한'이라는 어구를 보고 얼마나 예쁘다고 생각했던지! 맛이 심심하다, 간이 삼삼하다라는 말은 어딘지 2% 부족한 맛이 날 것만 같은데 슴슴한 맛이 난다고 하면 세상 제일의 별미일 것만 같다. 이름도 슴슴하니 귀여운 여기당은 은행나무 단풍이 예쁜 통일전 근처, 서출지 앞의 작은 식당이다. 규모가 워낙 작아서 점심 장사만 하고, 메뉴도 시래기밥과 시래기전으로 단순하다. 남편이 남자친구였을 시절에 오픈런을 시도해 입장에 성공했고 부모님을 모시고 또 가보고 싶었지만 역시 실패했다. 시래기밥도 시래기전도 슴슴한데 깔끔하고 살짝 부족한 듯한 양이라 더 맛있고 다른 곳에서 후식을 실컷 즐길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특히 가을 단풍이 들면 산림환경연구원을 산책하며 알록달록 단풍과 낙엽을 만끽하고 통일전 앞 은행나무길에서 사진을 찍기 전에 여기부터 들러서 배를 든든히 채우는 것도 좋을 것이다.




스산할 정도로 사람이 없긴 하지만 사람 많은 곳은 질색팔색이라면 삼릉 앞 참나무장작닭숯불구이집

일 년 내내 경주는 사람들이 미어 터지는 곳다. 특히 지금 같은 날씨부터 11월 중순까지는 반월성, 황룡사지, 교촌마을, 보문단지, 밀레니엄파크, 불국사, 화랑의 언덕, 산림환경연구원, 거를 타석이 하나도 없다. 우리 식구들은 하나같이 내향형 인간들이라 사람 많은 곳이라면 질색팔색을 하고 나도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사람 많은 곳을 다니면서 안 그래도 부족한 에너지를 몽땅 나눠줄 수밖에 없으니 이런 곳은 3대 가족여행 코스로는 적합하지 않다. 11월의 늦가을, 친정부모님을 모시고 나선 가족여행에서 우리는 비록 단풍도 없고 사람도 적어서 스산하지만 소나무를 실컷 구경하고 피톤치드 흠뻑 마실 수 있는 삼릉으로 향했다. 삼릉 앞에는 외양만 그럴듯하고 사람이라곤 찾을 길 없는 한옥 카페도 있고, 어딘지 모르게 허름해 보이지만 참한 유리 그릇으로 손님을 맞이하며 야들야들하고 건강한 속살을 뜯을 수 있는 참나무장작닭숯불구이 식당도 있다. 너무 스산하고 어딘지 모르게 허름해 부모님을 모시고 가기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여기서 든든하게 배를 채운 우리 가족은 결국 통일전과 산림환경연구원 관람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집 앞에 본점이 있었던 조조칼국수를 굳이 1티어 맛집 지점에서 맛보기

우리집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또래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사촌언니네와 경주 여행을 가면서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이 바로 끼니였다. 떡갈비정식, 미역국정식, 육회정식... 각종 정식집을 이리저리 헤매다 최종 선택을 바은 곳이 바로 조조칼국수였다. 이곳 또한 극악의 웨이팅 시간을 자랑하지만 원격줄서기가 가능하고 메뉴가 칼국수, 해물파전 뿐이라 단순하며 고추를 빼달라고 말하면 아이들도 맛있게 먹을 수 있어 낙찰을 받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면도 탱탱하고 파전에 해물도 듬뿍인데다 가게 안도 깔끔하게 관리가 잘 되고 있었으며 직원들도 싹싹해서 좋다. (내가 먼저 묻지도 않았는데 칼국수 4인분과 파전 두 개를 시켰더니 고추 있는 것, 고추 없는 것으로 반반씩 나누어서 주문하면 되냐고 물어 주셨다. 괜히 눈치가 보여 못 물어보고 있었는데...) 메뉴가 그러하니 가격이 싼 건 당연할테지만 그래서 더 좋다. 우리 일행 총 일곱 명은 각자 고추 있는 칼국수, 고추 있는 파전, 고추 없는 파전, 고추 없는 칼국수가 제일 맛있다며 기가 막히게 서로 다른 메뉴를 베스트로 꼽았다. 




세련되지 않지만 편안했던 수석정

아이가 아직 두 돌이 되기 전에 아버지의 생신으로 1박 2일 경주 여행을 다녀오며 들른 곳이다. 어마어마하게 밀려드는 인파를 헤치고 불국사 단풍 구경을 마친 후 사람에게 치여 녹초가 된 3대를 이끌고 맛집까지 찾아가 또 무한 기다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2년 남짓 경주 현지인으로 살며 주로 식당을 대상으로 가전 수리 기사로 일했던 남동생이 안내한 곳이 바로 수석정 한식당이었다. 신상 가게나 핫플이 즐비한 경주 도심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있는데, 외관부터 세월이 제법 오래되었다. 이름처럼 수석이 많은 곳은 아니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늙은 호박과 반들반들한 나무 장식과 그릇 등이 마루(?)에 장식되어 있고 좌식 방으로 안내받을 수 있어 어린 아이를 눕히기도 수월했다. 부모님을 모시고 간 터라 비싼 코스로 시켰지만 만족스러웠다. 간이 꽤 있는 편으로 심심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입맛에 딱 붙는다. 




너 이거 한 입 맛봐라, 산죽한옥마을에서 멍게칼국수

절정을 맞은 불국사의 단풍을 구경하며 일 년 중 불국사에 사람이 제일 많은 때가 아닐까 싶었으나, 그렇지 않았다. 불국사 주차장 위에서부터 나이를 제법 먹은 겹벚꽃나무들이 즐비하게 자라 있는데 여기가 또 벚꽃이 막 진 후에 아쉬운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기에 최적의 장소라 봄에서 여름으로 막 넘어가려는 봄의 끝물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주말에 가 볼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아 평일 칼퇴근 후 해가 지기 전까지 짧게나마 꽃구경을 가기로 했다. 친정부모님과 아이와 함께 1시간 남짓 벚꽃을 구경하니 슬슬 해가 진다. 불국사 초입에 물론 식당이 즐비하지만 사람에 치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 뿐이다. 근처에 산죽한옥마을 안의 한식당에 가려고 했지만 부모님이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먹고 싶지 않다고 한다. 한옥마을에 도착하고 나니 한 곳에 한식당, 저 쪽에 양식당, 가운데에 아담한 칼국숫집이 있다. 테이블 수가 워낙 적어 사람이 얼마 없는데도 빈 테이블이 거의 없다. 뜻밖에 멍게를 넣은 칼국수가 별미였다. 그리고 우리는 동궁과 월지의 아름다운 야경을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경주에 다녀온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니 다녀왔던 식당은 물론 이게 전부가 아니다. 갈빗집, 밀면집, 코다리냉면집, 브런치 카페, 황남빵, 찰보리빵, 보문단지 앞의 길거리 음식들(황리단길의 분점이었다), 흔하디 흔한 떡갈비 정식 가게까지 참 많은 식당을 들락거렸다. 거길 다 소개하기엔 지면도 너무 짧고 손에 쥔 정보도 초라하다. 경주는 이제 전통 있는 역사유적지가 아닌 전국민이 사랑하는 관광지가 되었으므로 이렇게까지 웨이팅을 길게 해서 끼니를 때워야 하는가, 싶은 곳이나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유명 맛집은 굳이 쓰지 않으려 했다. 기준도 없는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그곳에서 보낸 짧은 시간들이 참 좋았기 때문이다. 산들바람을 맞으며 볼이 터지도록 입 안에 밀어 넣던 노랗고 폭신하고 짭조롬한 계란의 맛, 새콤달콤하고 시원하고 야들야들한 육회를 씹던 감촉, 느린 햇살을 받으며 한 입 한 입 정갈하게 들어가던 밥과 시래기의 풍아함, 의외로 이게 맛있다면서 너도 한 입 나도 한 입 권하던 칼국수 한 젓가락도 참 나를 따스하게 하고 편안하게 했다. 가을 하늘은 높고 날씨는 미치도록 좋은데 온종일 일과 육아에 치여 밥 한 끼 편안하게 먹는 것만이 오롯한 행복이 된 요즘, 여행의 설레는 기분을 만끽하며 편안하고 만족스럽고 느긋하게 먹던 경주들이 사무치도록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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