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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Jul 08. 2022

더 맛있는 음식에 이유는 없다

비에이의 라벤더 아이스크림과 시골 동네의 새우튀김

결혼식을 반 년 앞둔 2016년 7월, 친하게 지내던 언니들과 넷이서 4박 5일의 여름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한여름에도 최고 기온이 25도라 시원하다는 삿포로였다. 삿포로 자체는 크지 않은 곳이라 뚜벅이 여행으로 하루 이틀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홋카이도 전체는 남한의 2/3에 육박할 정도로 큰 면적을 자랑하는 데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불편하다. 우리들은 하루 이틀 정도는 차를 렌트하여 비에이의 라벤더 밭과 푸른 호수, 패치워크의 길 등을 구경하기로 했다.


렌터카 사무실에서 키를 건네 받은 후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비에이의 라벤더 밭을 바라보며 맛보는 라벤더 아이스크림은 나름대로 특별했다. 라벤더 향이 조금 감돌았고 예쁘게 감아올린 보랏빛 자태는 그 나름의 귀여운 맵시가 있었다. 홋카이도는 신선한 식재료로 특히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유제품의 품질이 으뜸이라 아이스크림, 우유, 요거트, 치즈가 하나같이 맛있는 곳이기도 했다. 밀도가 높아 쫀쫀한 식감에 소프트 아이스크림 특유의 시원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우유 맛은 조그만 양산 그늘에 의지하며 보랏빛 여름 햇볕 사이를 누비던 우리들의 빨간 열기도 조금 눅여 주었다.


소프트 아이스크림 기계가 서 있던 기념품 가게를 잠시 구경한 후 우리는 바 테이블에 앉았다. 눈앞에 라벤더 밭이 펼쳐졌다. 파란 하늘과 보랏빛 물결이 시원했다. 가벼운 피로와 허기가 느껴졌다. 우리들은 한 손엔 조금씩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한 손엔 저마다 여행 책자나 스마트폰을 들고 점심을 먹을 만한 곳을 찾았다. 렌터카나 단체 여행객을 위한 고속버스가 아니면 좀처럼 오기 힘든 곳이라 후회 없이 한 끼를 때울 곳을 찾기란 쉽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대충 아무 곳에나 들어가서 한 끼를 때울까 싶었지만 급하지도 않은 한 끼를 굳이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시골 동네에 있는 돈까스 가게의 튀김이 아주 맛있다는 후기를 보고 우리는 바로 렌터카에 올라타 내비게이션을 켰다. 


8km, 5km, 3km... 도착지는 조금씩 가까워 지는데 식당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길이 널찍하고 한적한 시골 동네라 운전은 어렵지 않으나 다문다문 주택과 편의점이 보이는 평범한 시골 동네일 뿐 비슷한 다른 식당조차 보이지 않아 더욱 불안하다. 뒷자리에 앉은 언니들은 이때만 해도 운전 초보거나 운전 면허가 없어 주위를 보는 눈이 어두웠다. 조수석에 앉은 언니는 나와 번갈아가며 운전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이 언니의 매서운 눈에도 우리가 점찍은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이 동네를 크게 두 바퀴 돌아 목적지로부터 1.5km 가량 떨어진 곳으로 돌아왔다. 아마도 동네 초입일 터였다. 내비게이션을 잘못 찍었거나 길을 잘못 들었거나 식당이 없거나,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아도 뾰족한 길은 보이지 않고 스멀스멀 당혹스럽다. 


이 식당으로 가자고 먼저 제안하고 직접 운전대까지 잡았던 나는 이쯤에서 그만 포기하고 근처 편의점으로 가는 건 어떨까, 먼저 의견을 냈다. 우리 모두 입 안은 텁텁하고 위 속은 텅 비었으며 에어컨을 틀긴 했지만 쨍하고 지겨운 시골 동네 풍경만 30분 넘게 빙글빙글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넷 중 가장 먹는 걸 좋아하고 나이도 어렸던 나의 시무룩하고 미안한 목소리에 조수석의 제일 큰 언니가 한 번만 더 찬찬히 돌아보자고 어깨를 도닥였다. 뒷자리의 두 언니들도 헤드레스트를 껴안다시피 바짝 앞으로 당겨 앉았다. 나는 언니들의 다독임에 다시 한 번 힘을 내면서 내비게이션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느라 사거리에서 신호도 오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우회전을 했다. 한적한 시골 동네라 반대편에서 오는 차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언니들은 아찔함을 꾹 참고 식당을 못 찾아도 되니 천천히, 천천히, 함께 심호흡을 반복했다.


식당은 허무할 정도로 찾기 쉬운 곳에 있었다. 어디서 팟 하고 튀어나온 것처럼 갑자기 부자연스럽게 나타났다. 30분 넘게 헤메느라 이미 한창 손님이 많을 시간이 지나 있어 오히려 가게 안은 덜 부산스러웠지만 하마터면 마감 시간에 맞추지 못할 뻔했다. 부리나케 돈까스와 새우까스를 시켰다. 메뉴를 고를 여유도 에너지도 없었으며 best 딱지가 붙어 있어 주문은 어렵지 않았다. 음식도 빨리 나왔다. 평범하다 못해 성의 없어 보이는 메뉴들과 음식이 나오는 속도가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의미 없는 불안이었다. 


돈까스도 새우튀김도 맛있었다. 풍요롭고 밀도 높은 돼지고기와 새우 본연의 식감을 아름다울 정도로 잘 지키고 있었다. 튀김은 깨끗하고 고소했으며 바삭하고 부드러웠다. 입술이 번들거리지도 않았고 입 안을 긁히지도 않았다. 평소에 잘 먹지 못하는 새우 대가리까지 오독오독 잘도 해치웠다.


배가 고파서 더 맛있는 게 아니었다. 여기 도착하느라 30분 넘게 길을 헤매서 더 맛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편의점에서 가볍게 한 끼를 때우면 될 것을 괜히 욕심을 부려 나만큼 입맛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일행 모두를 배곯게 해서 더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름 없는 시골 동네에서 계획 없던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들락거릴 만한 평범한 식당이라 더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대하든 기대하지 않았든 미안하든 미안하지 않았든 기다렸든 기다리지 않았든 그냥 맛있었다. 참 맛있었다. 


미안함과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제일 먼저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다행히 느긋한 마음으로 제일 먼저 식당 문을 열고 다시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조수석의 언니가 운전을 교대해 이날 남은 시간은 조수석에서 여름의 시골 경치를 온전히 만끽했다. 초록 풀밭, 이름 없는 하얗고 작은 꽃이 점점이 핀 들판을 어루만지던 넘실바람, 다문다문 서 있던 키가 큰 포플러 나무, 갈대도 아닌 벼도 아닌 가을빛의 누런 언덕배기는 삼십대 초중반의 우리들이 만끽하기에 썩 만족스런 풍경은 아니었다. 그 풍경은 이렇게 넷이 여행을 가는 건 아마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따뜻한 바람처럼 지나가던 감상을 남겼던 언니의 말과 함께 오래도록 추억 속의 동영상으로 남게 되었다. 나는 6개월 뒤 결혼을 하고 6개월 뒤 아이를 가졌으며 9개월 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그때 스쳐갔던 언니의 말을 오래도록 되새기게 되었다.


삿포로에 도착한 첫날 맥주 축제장 야외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구운 옥수수를 안주 삼아 마셨던 생맥주의 시원함도, 운하의 도시 오타루를 하루 종일 걸어다니다 해가 질 무렵 과일 가게에서 집어 와 길거리에서 맛보았던 나무젓가락에 끼워 파는 유바리 메론의 달콤함도, 좁고 북적대고 연기가 자욱하던 징기스에서 쯔란을 콩콩 찍어 먹던 양갈비의 묵직함도, 노란 장식이 귀여웠던 케이크 가게에서 하나씩 담아 가서 맛보았던 치즈케이크의 달랑임도 모두 오래도록 추억 속의 사진으로 함께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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