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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Sep 27. 2022

강릉에서 삼일네끼

여성 히어로를 키워 내는 부모의 식도락 여행

네 시간 넘게 달리니 드디어 강릉이었다. 체크인을 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라 일단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우리가 선택한 곳은 메밀김밥을 판다는 강문해변 앞 메밀막국수 가게였다. 한여름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강문해변을 바라보며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막국수를 후루룩후루룩 삼키고 메밀김밥을 우물우물 씹으며 별미를 느껴 보려 했으나 여름 휴가철 답지 않게 살짝 춥다 싶을 정도로 날씨가 흐리고 비가 다문다문 내렸다. 그래도 사람이 적어 바로 입장이 가능하니 뙤약볕에 긴 줄을 서서 대기를 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막국수를 주문하려니 날씨가 너무 쌀쌀맞다. 일단 가게의 명물 메뉴라고 알고 김밥부터 골랐다. 식당의 시그니처 메뉴라는 우동막국수도 같이 주문했다. 역전 가락국수 향이 진하게 나는 국물부터 한 술 뜨고 후룩 삼키는 따뜻한 메밀면이 생경하면서도 혀끝에 착 붙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라 역시 막국수보다는 우동이고, 강원도는 역시 우동보다는 막국수인데 때와 곳이 기가 막히게 짝 소리를 내며 박수를 친다. 김밥은 빨간색(매운 맛) 한 줄, 하얀색(크림치즈맛) 한 줄을 시켰는데 둘 다 맛만 다를 뿐 맛있는 건 똑같다. 메밀김밥은 여기서 처음 먹어 보았는데 역시 명물이 만하며 제주도의 전복 김밥이나 경주의 교리 김밥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음식으로 지역색을 느껴 보려면 역시 김밥이 제일이지. 한 입 가득 김밥 꽁다리를 밀어넣고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우동막국수와 메밀김밥은 점심, 마음에 점을 찍을 뿐 진짜 거한 한 상은 될 수 없다. 제대로 거하게 한 끼를 먹으려면 일단 호텔에 짐을 풀고, 당연히 술도 곁들여야 되니 차도 던져 놓고 맨발에 조리 슬리퍼를 짤짤 끌며 느긋한 마음으로 길을 나서고 봐야 한다. 특히 여행을 갈 때마다 운전을 전담하는 남편은 '제대로 거하게 한 끼'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점심 메뉴로 메밀막국수와 메밀김밥을 추천한 내 선택에 반색한 것도 점심을 가볍게 먹어 줘야 저녁에 제대로 거하게 한 끼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경포대 해수욕장과 호텔 인피니티 풀 이상으로 저녁을 먹는 데 여행의 의미를 둘 남편을 위해 메뉴 및 식당 선정은 그에게 일임했다. 그의 선택은 호텔 바로 앞에 즐비한 경포대 횟집들 중 연식이 오래되어 외관과 내부 디자인이 후줄근하지만 메뉴 구성과 맛은 제일 낫다는 한미횟집이었다. 호텔에서 한미횟집까지는 걸어서 3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고, 한미횟집 바로 앞은 그 유명한 경포대 해수욕장이었다. 계획대로였다면 동네 슈퍼에 라면 한 봉지 사러 가는 가벼운 마음으로 횟집에 도착해 배가 터지도록 저녁 식사를 즐기고 파도 소리도 바닷바람도 시원할 경포대 해수욕장을 걸으며 꽉 찬 뱃속을 달랠 터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비는 그치지 않고 추적추적 내렸다. 남편이 앞장을 서고 나는 아이가 비에 젖을세라 꼭 안다시피 바짝 붙어 서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 횟집에 도착했다. 



비가 오는데 회를 주문할 리는 없었고, 비가 오지 않아도 회를 주문할 계획은 없었다. 우리는 대게와 치즈새우 2인 세트를 주문했다. 대부분의 횟집이 그러하듯 대게와 치즈새우가 나오기 전 이미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진수성찬이 펼쳐졌다. 아이는 생선구이와 공깃밥을 조물조물 먹더니 아직 상차림이 바뀌기도 전에 수저를 내렸다. 나는 맥주를 주문한 것을 후회하며 두 병째부터는 매화수를 주문했고 남편도 소주로 술을 바꾸었다. 때마침 대게와 치즈새우가 연달아 나오며 상차림이 바뀌었다. 우리는 잔뜩 취해 뱃속이 어디까지 차올랐는지도 자각하지 못하고 신나게 부어라 마셔라 뜯어라 삼켜라를 반복했다. 아이는 그런 우리를 보는둥 마는둥 스티커와 색칠놀이에 몰두해 있었다. 



만취한 채 잠들고 난 다음 날이 되서야 어제 저녁 식사가 별로 입에 잘 맞지 않았을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아이는 밑반찬으로 나온 가자미구이와 공깃밥과 김으로 식사를 끝냈었다. 뒤늦게 나온 대겟살이며 치즈새우구이를 아무리 권해도 맛조차 보지 않았다. 평소 집밥을 가장 좋아하고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에게 대게며 새우는 반가운 음식이 아닐 터였다. 가만히 어제 저녁을 회상하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초반 장면이 떠올랐다. 웃지 않을 수 없었고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를 잘 알고 있는 남편에게 어제 우리의 모습이 꼭 치히로의 돼지 부모 같지 않냐고 이야기했다. 남편은 동의하면서도 위장이 터질 것 같았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아이에게 미안했던 우리는 이튿날 점심만큼은 아이도 만족스러울 식당에 가고 싶었다. 숙취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의 위장도 고려한 끝에 선택한 곳이 초당순두부와 짬뽕순두부를 함께 팔고 있는 식당이었다. 순두부 아이스크림 가게까지 끼고 있는 곳이라 더욱 기대가 컸다. 날은 맑게 개어 있었다. 남편이 주차를 하는 동안 먼저 차에서 내려 대기표를 받아들었다. 때를 딱 맞추어 남편이 주차를 마치고 아이와 차에서 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양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초당순두부 1인분과 짬뽕순두부 2인분을 주문했다. 내가 가끔 해 주는 순두부찌개를 그닥 좋아하지 않던 아이의 과거를 회상하며 괜히 긴장했으나 아이는 초당순두부가 입에 잘 맞는지 굳이 떠먹여 주지 않아도 식사에 열심이었다. 짬뽕순두부는 해물을 듬쁙 머금고 있어 칼칼하고 시원해 숙취에 맞춤이었다.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 개운한 얼굴로 식당을 나왔다. 남편이 아이를 차에 태우고 주차된 차를 빼는 동안 아이스크림 줄을 섰다. 카시트에 얌전히 앉아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는 순두부 아이스크림 컵을 싹싹 비웠다. 



모두가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속을 달래 컨디션이 좋은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늘은 맑게 개었고 우리는 쨍쨍한 여름 한낮을 만끽했다. 사륜자전거를 대여해 경포호수를 한 바퀴 돌며 뜨거운 햇살과 시원한 호숫바람을 실컷 쬐었다. 호텔로 돌아와서는 야외 인피니티 풀에서 인파에 섞여 저녁 식사 시간이 되기 전까지 물놀이에 열중이었다. 아이는 일 년 새 엄청나게 자라 있었다. 작년 여름만 해도 물에 들어가는 데만 한 시간 가까이 걸릴 정도로 겁을 먹었었는데, 올해는 링튜브만 하고도 혼자 배영까지 할 정도로 수영을 즐겼다. 그러나 일정이 고된 탓이었을까, 저녁 식사로 먹은 닭강정이 너무 기름졌던 탓이었을까, 2박 3일 여행의 마지막 날 아이는 그만 급체를 하고 말았다. 음식을 먹는 족족 토하기 바쁘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라 그나마 다행이라며 우리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짐을 꾸렸다.



그래도 바다 앞까지 왔는데 회는 한 번 먹어야겠지? 어차피 술도 못 마시는 거 횟집은 좀 그렇고, 마침 점심시간보다 조금 이르니까 요 근처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맛집에 오픈런 하는 건 어때? 위장이 쌩쌩한 부모는 어쨌든 한 끼를 때워야 했다. 체크아웃을 하고 강릉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메시56이라는 일본식 회덮밥 식당이었다. 에비스 생맥주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기어이 맥주도 한 잔 주문했다. 안 왔으면 어쩔 뻔 했을까 싶을 정도로 맥주와 회덮밥의 조합이 환상적이다. 이 식당은 뜻밖에 유아를 위한 밥상을 무료로 차려 주었는데 흰쌀밥에 미소장국, 연어구이와 김을 실리콘 유아식기에 정갈하게도 담아 왔다. 이 정도면 돈 받고 팔아도 충분한데 괜히 황송하다. 급체를 한 아이가 잘 먹지 못할 것 같아 조금은 난처한 시선으로 아이를 물끄러미 본다. 급체와 별개로 배가 너무 고팠던 아이는 우적우적 잘도 밥을 먹고는 차를 타자마자 전부 토하고 말았다. 



사실은 돼지 두 마리였다는 엄마 아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 같아 아이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이가 어른들과 함께 온전히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된 것만 같아 기뻤다. 아이는 편도 4시간 가까이 차를 타면서 때로 짜증을 부리고 칭얼거리기도 했다. 덕분에 핫바와 핫도그와 호두과자를 잘도 얻어먹었다. 초당순두부에 공깃밥을 배터지게 먹고 순두부 아이스크림까지 싹싹 긁어먹고는 밀려드는 식곤증에 엄마와 아빠의 사이에 앉아 사륜자전거를 타며 끄덕끄덕 졸기도 했다. 수영장에서 더 놀 수도 있었을 것을 배가 너무 고프다며 이제 그만 퇴장을 종용했고 (매운 건 아니지만) 새빨간 양념 닭강정을 오물오물 먹고는 급체하여 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고생을 했다. 유명 체인 호텔이 아닌 걸 어떻게 알고는 이 호텔은 좁고 답답하고 침대도 불편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경포대에 또 오자며 제가 갔던 곳의 이름을 기억했다. 앞으로 아이는 여기 저기 여행하며 성장할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여성 히어로 치히로처럼 돼지가 된 엄마 아빠를 새로운 세계로 구원해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세 가족은 더욱 끈끈하게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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