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키크롬로프의 라자냐
결혼 전 이미 괌에서 4박 5일의 여름 휴가를 함께 다녀왔었던 우리 부부는 신혼여행지 선택에 몹시 신중했다. 3일 이상 휴가를 내기 어려운 남편에게 신혼여행은 퇴직 전 주어진 가장 긴 휴가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동남아 휴양지는 꼭 신혼여행이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와이나 몰디브도 생각했으나 괌에 이어 또 휴양지를 가기는 조금 아쉬웠다. 두 다리가 튼튼하고 체력이 좋은 지금 갈 곳은 바로 유럽이라고, 나는 결정했다. 이때만 해도 남편은 내 이야기라면 뭐든 잘 들어주었기 때문에 별말없이 수락했다. 겨울이라 마침 비행기 티켓도 저렴해 그날로 프라하-빈 항공권을 예약했다. 프라하에서 3일 머문 후 이동하며 하룻동안 체스키크롬로프, 할슈타트를 관광하고 빈에 도착하여 3일을 보내는 7박 9일의 일정이었다. 프라하에서 빈으로 바로 가는 기차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유럽의 예쁘고 소박한 시골 풍경도 보고 싶어 중간에 체스키크롬로프와 할슈타트를 경유하기로 했다.
프라하에서 아침에 셔틀 봉고차를 타고 3시간을 이동해 체스키크롬로프에 도착하여 반나절 관광을 하고, 오후 세 시 쯤 다시 봉고차에 올라 3시간을 이동해 할슈타트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낯선 사람들과 좁은 봉고차 안에 앉아 조그마한 차창 밖으로 휙휙 넘어가는 삭막한 체코의 시골 풍경을 보고 있자니 괜히 식은땀이 났지만 역시나 무사히 도착한 체스키크롬로프는 과연 소박하고 아름다웠으며 고즈넉했다. 겨울이라 거리는 스산했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어 오히려 관광지 느낌이 나지 않았다. 동화마을 같다는 경치를 더욱 서정적으로 만드는 낮은 붉은 지붕을 머리 위에 얹고 낡은 돌길을 자박자박 걸으며 마을을 한 바퀴 빙 도는 데는 채 2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쯤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여행 책자에는 점심을 먹을 만한 식당을 두어 군데 소개하고 있었다. 이 동네의 식당은 유리창문이 없는 벽돌집 형태로 되어 있어 안을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을 굳이 찾아가고 싶진 않았다. 관광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작은 시골 마을이니 대단한 맛집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민트색 회벽이 인상적인 <papas> 식당으로 들어갔다. 외부에 비해 내부가 넓었고 나무색 바닥과 높은 천장이 인상적이었으며 적당히 고풍스럽고 적당히 시골스럽고 적당히 어둡고 적당한 자리가 있었다. 한국인들이 꽤 많이 있어 조금 더 마음이 푸근해졌다. 메뉴를 고를 것도 없이 여행책자에서 추천하는 대로 돼지고기 립과 라자냐를 주문했다. 곁들일 코젤 병맥주를 함께 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쉽게도 생맥주는 없었다.)
립이야 한국에서도 아웃백에서 자주 먹던 것이라 낯설지 않았지만 라자냐는 평소에 잘 시키지 않는 메뉴다. 그 당시에 한국에서는 고르곤졸라 피자가 한창 유행하고 있을 때라 굳이 라자냐를 접하기란 더더욱 어려웠다. 은근한 기대와 은근한 불안을 가지고 라자냐를 한입 맛보았다. 이미 5년도 더 지난 맛이라 자세한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남편의 말을 빌리자면 이제까지 맛본 피자 중에 제일 맛있었다. 여행 책자에서 추천할 만한 집이었고 추천할 만한 메뉴었으며 어차피 여기 다시 오긴 힘드니 부디 입소문이 널리널리 퍼져서 체스키크롬로프에 오는 모든 한국인들은 꼭 이 집에 들러 이 라자냐를 먹어봤으면 싶은 맛이었다. 추운 날씨와 스산한 거리가 원래 감동적일 정도로 아름다웠을 체스키크롬로프의 풍경을 퇴색시키고 있었으나, 이 라자냐는 체스키크롬로프에 대한 한 가닥 아쉬움을 다독이듯 이곳을 풍요롭고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가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면 우리는 꼭 라자냐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시킬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데, 이게 다 체스키크롬로프의 <papas>에서 먹었던 그 라자냐 덕분이다.
우리 부부는 둘 다 대단한 감성이나 해박한 지식을 가지지 못했다. 그저 삼시세끼 맛있는 밥 먹고 하루 일과를 간단히 나누는 것에 만족과 행복을 느끼며 함께 하는 시간을 쌓아 왔다. 가끔 지난 날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이 라자냐가 빠짐없이 나오는 이유는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라자냐 이야기가 나오면 그 주변에 우리 둘만의 사랑과 행복이 하나 둘 모여든다. 이국적이면서도 입에 착 들어맞던 맛. 조금 느끼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곁들이는 코젤 흑맥주. 부부 사이의 사랑을 닮은 쌉싸름하고 부드럽던 맥주의 목넘김. 귀를 적시며 낯선 곳의 긴장을 풀어 주는 소근소근한 목소리. 무릎이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상대방과 마주 보고 앉아 공간을 공유하던 간격. 작은 마을을 돌아보며 조금씩 무거워진 다리가 편안해지던 휴식과 충전의 시간까지.
신혼여행이라는 일생일대의 대단한 사건에서 우리가 꺼낸 추억들은 하나같이 매일매일 맞이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었다. 특별한 일상이 오래도록 되새길 추억이 되는 건 여행지의 아름다운 풍경에 맛있는 라자냐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끔 식당에서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라자냐를 만나면 언제나 그때의 특별했던 일상을 호명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