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8090 : Episode Ⅰ
거리의 레코드 가게 LP에서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이 흘러나오던 1991년.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우리는 항상 붙어 다녔다.
중학교 2학년 같은 반이었을 때의 기억이 너무나 즐거웠기에
졸업하고 인근의 고등학교로 뿔뿔이 흩어졌음에도
수업이 끝나면 우리는 언제나처럼 중간지점에서 만나 함께 독서실로 향했다.
마포고등학교에 다니던 형수,
강서고등학교에 다니던 경철이와 영호,
그리고 영일고등학교에 다니던 나.
우리 4 총사는 외모만큼 성향도 모두 달랐지만
함께 있을 때의 일상은 언제나 새롭고 흥미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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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써머리 문제집 사게 팔천 원만..."
8,90년대 학창 시절을 경험한 이들에게 추억의 수험서인 써머리(Summary) 시리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지금의 A4 사이즈 수험서와는 달리,
써머리는 실제 시험지 크기인 B4사이즈를 달력처럼 뒤로 넘기는 검은색 문제집이었다.
"내일까지 써머리 국.영.수 가져와서 아침 자율학습 시간에 한 장씩 풀도록!!!"
담임쌤의 종례시간 엄포를 상기하며,
팔천 원을 움켜쥐고 집을 나선다.
매일 모이는 장소인 등촌시장 입구 육교로 가니 먼저 와 있던 친구들이 눈을 흘긴다.
"아이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빨리 가자."는 핀잔과 함께 독서실로 향한다.
그런데, 시장골목 초입을 지나 순댓국집을 지날 즈음 영호가 넌지시 말한다.
"아~ 오늘 기분도 꿀꿀한데 투다리나 갔으면..."
도대체 기분이 꿀꿀하지 않은 날이 있기나 한 걸까 싶은 영호의 말이지만,
모두의 마음을 흔들기에도 충분한 말이다.
추억의 '투.다.리.'
우리는 가끔, 정말 아주 가끔 그곳에서 일탈을 즐겼다.
오천 원짜리 네모난 관광소주 한 병에 오천 원짜리 오뎅탕 한 그릇을 시켜 놓고는
'도대체 대학을 왜 가야 하는지', '게슈타포와 미친개 쌤은 왜 학교마다 존재하는지'와 같은
해답 없는 토론을 하며 청춘을 한탄했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오뎅탕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이고,
서비스로 4번이나 시킨 양배추까지 바닥을 드러내면
우리의 시선은 테이블에 놓인 물이 반쯤 섞인 케찹병으로 향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시킬 돈이 없었던 우리는,
핫도그에 그러듯 각자의 새끼손가락에 케찹을 가지런히 그었다.
그리고는 소주 한 모금에 손가락 한 마디씩만큼의 케찹을 빨아먹었는데,
순간의 탐욕을 이기지 못해 한마디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녀석은
다른 친구들에게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창작미 가득한 욕을 들어야만 했다.
영호의 말을 듣는 순간부터 우리 모두는 이미 마음속으로나마 투다리에 가 있었다.
그러나, 수중에 돈이 없는 현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이 와중에 미쳤는지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튀어나온다.
"나 팔천 원이 있기는 한데..."
일순, 녀석들의 눈동자가 꿈틀거린다.
"근데, 나 이거 써머리 문제집 살 돈이야. 내일 안 가져가면 우리 담임 알지?"
가구나 악기로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용도로 써야 할 오동나무를,
정.신.봉.이라고 이름 붙인 반질반질한 몽둥이로 용도변경시킨 담임의 모습이 떠올라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형수가 나에게 묻는다.
"어? 써머리? 무슨 과목 필요한데?"
"국, 영, 수..."
"야!!! 나 그거 한 권씩 다 있어.
어제 학교에서 써머리 국, 영, 수랑 선택과목까지 다 받았는데 집에 새 책 그대로 있거든. 내 거 가져가!!!"
형수가 다니는 학교의 동문회에서 학생회 임원들에게 써머리 주요 과목을 격려차 주었는데,
당시 전교부회장이었던 형수도 받았다는 거다.
가자! 투다리로!!!
우리는 극적으로 반전된 상황에 마치 해방이라도 된 듯,
시장 한복판 순댓국집 앞에서 큰 소리로 "써머리~ 써머리~"를 외치며 웃었다.
그런데 그 순간 순댓국집에서 나오던 불량끼 다분한 3명의 무리가
우리를 가만히 노려보더니 다가와서 시비를 건다.
술 냄새가 확 풍겼다.
특히 그중 한 명은 유난히 흥분하면서 거의 우리를 칠 기세였다.
우리가 조금 소란스럽기는 하였지만 누구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지 영문을 몰라 황당해하는 우리에게,
갑자기 흥분하던 놈의 발이 날아왔다.
난 재빨리 경철이에게 향하는 발을 가방으로 밀쳐냈고, 순식간에 우리는 시장길 한복판에 서서 대치했다.
1, 2초의 정적 후, 아무래도 큰일이 나겠다 싶어 난 친구들에게 나지막이 소리친다.
"얘들아~ 튀어!!!"
우리는 일제히 그들을 등지고 우리가 걸어왔던 시장 입구 쪽으로 뛰다가 육교로 뛰어올라 찻길을 건넜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상대방도 우리를 쫓아 뛰어온다.
그러나 우리는 한창 팔팔한 고딩들이었고, 상대방은 술. 담배에 찌든 불량배였다.
우리와의 격차는 점점 벌어졌고, 열심히 뛰던 우리 일행 중 영호가 소리친다.
"야~ 잠깐만 서봐봐."
영호의 말에 우리 모두 뛰는 것을 멈추었고,
뒤를 돌아보니 쫓아오던 일행들은 모두 뒤처지고 한 명만 남아있다.
한 명이 우리 4명을 쫓아오는 형국이 된 거다.
상황은 역전되었고, 이번엔 우리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졸지에 입장이 바뀐 그는 고딩들이 다가오니 체면상 도망가지는 못하고 '어~ 어~' 하다가 우리한테 둘러싸였다.
투다리를 가자고 했던 자신 때문에 이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긴장이 풀리면서 미안한 마음이 겹친 영호가 갑자기 불량배에게 달려들었다.
우리는 영호를 진정시키고,
뛰면서도 궁금했던 '도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나서 우리에게 시비를 걸었는지'를 따져 물었다.
근데 상대방의 대답이 뜻밖이다.
"아니 너네가 내 친구한테 소머리라고 했잖아!!!"
"뭐? 소머리???"
"걔 별명이 소대가린데... 너네가 아까 소머리라고 놀렸잖아.
그것도 어깨동무까지 하면서...
안 그대로 얼굴 크다고 놀림받는 거에 예민한 앤데, 나이도 어린 고삐리들이 소머리라고 놀리는데 가만히 있겠냐?"
그러고 보니 일행 중에 유난히 흥분하며
우리에게 발차기를 날리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상이 꽤 컸던 것 같다.
알고 보니 이랬던 거다.
그들이 순댓국집에서 술을 한잔 걸치고 나오는데
우리가 '써머리'라고 소리치며 웃는 걸 보았고,
그중 한놈이 '써머리'를 자기를 놀리는 '소머리'로 들었던 거다.
허탈해진 우리는 자초지종을 얘기하면서 오해를 풀고 그를 돌려보냈고,
이번에는 써머리가 아닌 진짜 "소머리~ 소머리~"를 외치며 킥킥거렸다.
그날 밤하늘에서 우리를 비추던 달이,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소머리처럼 얼마나 크고 밝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