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도서관으로 출근하다가 주차를 하려다 보니 눈앞에 웬 나비가 있는 게 아닌가. 마음이 급해졌다. 대충 차를 세우고 살금살금 다가가 사진을 찍으려 보니 나비는 여전히 가만히 앉아 있다. 좀처럼 이런 일이 없는지라 급했던 마음을 달래가며 나비를 살펴보았다. 바로 암끝검은표범나비 수컷이었다. 날개도 깨끗한 것이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처음에는 큰멋쟁이나비라고 착각했다. 아마도 지난번 덕태산에서의 보았던 나비의 여운이 남아 있던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 눈앞에서 나비는 느긋하게 햇볕을 쬐는지 날개를 활짝 편 채로 윗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안정적으로 날개를 펼친 사진 몇 컷을 찍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옆면을 찍으려는데 나비를 좀처럼 접지 않는다. 이럴 때가 진짜 난감하다. 어떤 나비는 윗면을 찍고 싶어도 날개를 접고 있는 나비가 있는 반면에 어떤 나비를 좀처럼 옆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사진을 찍는 입장에서 나비는 몹시도 까탈스러운 모델인 셈이다.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비는 포즈를 취해줄 생각이 없는지 움직이지 않다가 순식간에 숲 쪽으로 날아갔다. 하필이면 나비가 앉은 곳은 내가 도저히 갈 수 없는 위치였다. 처음 앉아 있던 지점과는 대략 10미터쯤 거리가 있는 데라서 나비가 앉아 있는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나비는 거기 앉아서는 또 날개를 접고 있다. 정말 세상사 쉬운 게 없다.
살다 보면 내 마음대로 되는 일보다 되지 않는 일이 더 많다. 특히 자연과 관련되는 일은 더 그렇다. 고대하던 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갔으나 보지 못하는 경우 그 상실감과 낭패감은 클 수밖에 없다. 반면에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갔다가 눈이 호강하는 경우도 있다. 매번 야외에 나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자연이 주는 선물처럼 특별한 것은 없다. 아마도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어서 더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모른다.
아는 이들과 강원도 화악산에 간 적이 있다. 이름만 들어보았던 금강초롱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눈앞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금강초롱은 전 세계에 2종이 있는데 모두 한국에 자생하는 고산식물이다. 우리 토속식물인 금강초롱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담겨 있다. 우리 토종꽃임에도 일본인이 학명으로 Hanabusaya asiatica(Nakai) Nakai라고 붙이는 바람에 국제 학계에서 우리 이름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비운의 꽃이 바로 금강초롱이다.
산길을 가다 보니 금강초롱이 있기는 한데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상태였다. 너무 일찍 오지 않았나 후회를 하는 참에 좀 더 가다 보니 피어 있는 금강초롱이 있었다. 속상해서 안타까웠던 마음이 일시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몇 시간을 차를 타고 가서 만약 보고 싶었던 꽃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나는 그날 덤으로 참닻꽃까지 보는 행운을 누렸다. 산삼을 발견한 것보다 더 신나는 일이 새로운 식물을 만나는 일이다.
나비를 만나는 것도 그렇다. 예로부터 능이, 송이, 산삼은 친한 이만이 아니라 자식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귀하니만큼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다는 의미이다. 나비도 비슷하다. 희귀한 나비는 특정 지역에서만 서식하는데 이 지역은 실재가 아니라 전설 속에만 존재한다. 아는 이는 극히 적으며, 대개 10명을 넘지 않는다, 철저하게 비밀에 쌓여 있다. 일반인이 이 나비를 만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도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나비 중에 고운점박이푸른부전나비가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는 나비이다. 보통 이름에 ‘고운’이 들어가면 말 그대로 아름다움을 기본으로 삼는다. 이 나비는 일반적인 부전나비에 비해 그 크기가 제법 크다. 대략 500원짜리 동전만한 크기이기 때문에 부전나비과 나비 중에 가장 큰 편이다. 이 나비의 옆면은 부전나비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 나비의 진가는 날개를 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푸른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고운점박이푸른부전나비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탄성이 나오게 한다.
고운점박이푸른부전나비
이 나비는 오이풀의 꽃이삭에 산란하며 유충은 오이풀의 꽃이삭의 속을 먹는다고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이 나비는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고 강원도의 특정지역에만 산다는 점이다. 이 말은 이 나비를 만나기 위해서는 강원도까지 가야한다는 의미이다. 아는 이는 이 나비를 보기 위해 100번쯤 다녔을 때 비로소 처음 나비를 만났다고 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나비를 위해 300번 정도 왔다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절반만 잘라도 150번이고 100번만 잡아도 그게 어딘가.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지가 않다. 아, 그 지독함이란 단순히 좋아한다는 말로는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는다.
당신이라면 이렇게 어렵사리 만난 나비 서식지를 알려주고 싶겠는가. 나는 미안해서도 못 물어보겠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발견한 나비 서식지를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지 않는 게 나비인들에게는 금기처럼 알려져 있다. 상대방이 서운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혼자 독점하기 위한 것이냐는 비난도 일리가 있으나 그 속사정을 알고 나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가 나비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듯 우리도 그에게 그럴 필요가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
아주 친한 사이라 할지라도 쉽지 않은 게 나비 서식지를 공유하는 일이다. 그동안 무수히 들었던 이야기 중의 하나가 서식지가 알려지면 불과 1~2년 사이에 멸종한다는 내용이었다.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막상 비슷한 일을 간접 체험하고는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사람의 손이 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희귀한 나비 서식지에 대해서만큼은 꿈에서 갔던 곳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어차피 내가 운전을 해서 간 곳도 아니기 때문에 다음에 혼자 찾아갈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그러니 다른 이에게 그 장소를 알려줄 도리도 방법도 없다.
경북 의성지역에 조성한 붉은점모시나비 서식지
이게 참 묘한 게 아는 사람은 알려줄 생각이 없고, 알고 싶은 사람은 어떻게든 알고 싶어 한다. 비밀이나 난관이 있을수록 욕망은 더 간절해지는 법이다. 대개 사정은 이렇다. ‘너만 알아’가 낳는 대표적인 병폐는 누구나 다 ‘너만 알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속은 상하지만 차라리 모르고 마는 게 더 낫다. 사람의 손이 개입하면 개입할수록 나비 생태환경은 안 좋아지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무주 덕산 댐을 막은 둑에 쥐방울덩굴과 여러 먹이식물이 잔뜩 있었다. 당연히 나비 애벌레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찾은 곳에는 쥐방울덩굴과 식물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산소를 벌초하듯이 둑 전체를 깎아버린 때문이었다. 작업을 한 이들이야 거기에 생명체가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안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들이야 당연히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나비 애벌레들의 서식처는 일시에 사라져 버린 셈이다.
파괴된 나비 서식지. 사진 제공: 김경선
이런 일은 대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강원도에 갔을 때, 거대한 산이 인삼밭과 개간지로 변하는 장면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그곳도 이전에 나비가 살던 곳이라는 데 서식지가 파괴되었으며 더 이상 그 나비들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어디론가 옮겨 가서 생명을 이어갔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나비는 우리 곁에서 사라질 것이다. 기후 변화를 포함해서 여러 가지 변수로 우리 주변에서 사라질 위기의 나비들이 이미 생기고 있다.
대표적인 게 상재나비이다. 맑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흰나비과의 나비이다. 중국 연변에서는 아직까지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나비라지만 한국은 상황이 다르다. 예전에는 흔했겠지만 이제 더 이상 한국에서 이 나비를 만나지 못한다. 아마도 이 나비의 서식지였던 곳을 무분별하게 개발하고 살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 외에 농약이나 주변 환경의 변화도 상재나비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상재나비. 사진 제공: 오해용
나비가 부화한 후, 나비 알이 성충으로 변할 확률은 2% 남짓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 나비는 그 고된 길을 헤치고 세상에 나온 것이다. 나비 한 마리와의 만남으로 내 출근길이 행복해졌듯이, 세상 사람들이 나비를 만나면서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가끔은 고단한 일상에서 나비의 날갯짓을 따라 삶의 여유를 누리기를 바란다. 그들이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