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를 만나다

by 산들


나비와의 인연

살면서 한 명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쉽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어떤 이는 여러 명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한 명과 평생을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어쩌면 나비와 사랑에 빠지는 일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 나비만 평생 사랑하기에는 세상에 나비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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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런던을 찾는 이들을 설레게 만든 영화 노팅힐


사랑 이야기 하면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영화 <노팅힐>에서 세계적인 배우로 나오는 쥴리아 로버츠는 평범한 서점 주인인 휴 그랜트를 찾아간다. 이 대목에서 이 영화의 압권이라 할 수 있는 의미 심장한 대사가 나온다.


you know. the fame thing is not a real. don't forget this.

I'm just a girl.. standing in front of a boy. asking him to love her.


이 장면에서 쥴리아 로버츠는 자신이 남자에게 사랑을 애걸하는 보통 여자라며 휴 그랜트에게 자신을 다시 좋아할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 이 말을 들은 휴 그랜트는 잠시 당황하지만 이내 그녀의 구애를 거절한다. 자신의 마음이 여려서 한 번 더 버림받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거라며. 이 말을 들은 쥴리아 로버츠는 좋은 선택이라며 눈물을 글썽이며 이별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돌아서서 서점을 나간다. 하지만 남자는 잡지 않는다. 아마도 그의 마음은 잡고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영화는 두 사람의 결혼과 임신한 쥴리아 로버츠의 모습을 보여주며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나비를 볼 때마다 휴 그랜트와 내 신세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물론 나야 이제 초보이고 나비 이름도 헷갈리기 일수이지만 어쩌면 약간은 넘어간 느낌이다. 나비와 사랑은 아니었으나 붙잡고 싶었지만 결코 붙잡을 수 없었던 나비와의 얄궂은 만남을 원망했던 적은 있다. 살다 보면 가끔 시간을 되돌이킬 수 있다면 돌아가고픈 그런 순간이 있다. 나비와 만난 무수한 시간 가운데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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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인생에 만약은 없다고 말한다. 내게 나비생태학교를 소개해 준 이는 아내이다. 만약 아내가 무주에서 열린다는 나비생태학교 소식을 카톡으로 보내주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흰나비, 노랑나비만을 노래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봄이 되고 나비들이 날기 시작하면 잠깐 눈길을 주고 이내 다시 평범한 일상에 젖어들며 죽을 때까지 살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비와 식물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올해는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한 해이다.


나비를 공부하면서 역시나 제일 도움이 되는 건 현장이다. 현장은 나비를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배움터이자 생생한 학습장이다. 집에서 나비도감을 펼쳐두고 공부를 하는 것과 현장에서 나비를 만나는 일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나비 도감에 나오는 나비야 표본을 만들기 위해 날개를 펼친 상태에서 인위적으로 작업을 한 것이기 때문에 현장에서 만나는 나비와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다. 오래 경험한 이는 날아가는 나비만 봐도 무슨 나비인지 안다. 나비박사로 유명했던 석주명 선생은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나비 이름만이 아니라 암컷인지 수컷인지까지 판별을 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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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팔랑나비


자연은 나비 알과 애벌레가 존재하는 곳이며, 성충이 된 나비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공간이다. 호시탐탐 나비 알과 애벌레, 그리고 성충을 노리는 천적들이 곳곳에 상주하는 곳이기도 하다. 느긋하고 평화롭게만 보이는 나비도 늘 새나 다른 곤충으로부터 위협을 받으며 산다. 나 역시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가장 많이 나비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엉겁결에 나섰던 강원도행이었다

. 나비를 보러 간다는 말에 아무 준비도 없이 무작정 따라나섰다. 처음에는 1박 2일인 줄 알았는데 막상 가서 보니 2박 3일이었다. 나비 여행이라니, 게다가 이렇게 준비 없이 떠나도 될까 싶을 정도로 준비하지 않은 여행이었다. 살면서 지금까지 떠났던 여행 중 가장 황당하면서도 설레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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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는 내가 사는 동네와 나무의 형태, 숲의 모양 등이 확연히 다르다. 아직도 사람의 손길이 덜 미쳐서인지 유독 강원도에는 나비 서식지가 많은 편이다. 강원도에서 내가 가장 처음 만난 나비는 어리세줄나비였다. 이미 무주에서 한 차례 보았던 나비였으니 더 반가웠다. 그 당시에는 어리세줄나비가 얼마나 보기 힘든 나비인가를 알지 못했다. 연 이틀 이어서 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안타깝게도 도로에 앉아 있던 어리세줄나비는 날개가 상해 있었다. 가끔 날개가 상한 나비를 보면 내가 그런 것도 아니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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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네발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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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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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네발나비, 큰은줄표범나비, 왕자팔랑나비, 모시나비 등 처음 보는 나비들이 거기 있었다. 강원도라고 해서 나비들이 무리를 지어 있지는 않았다. 가끔 한두 마리가 선물처럼 날아와주었을 뿐이었다. 처음에 2박 3일 동안 기대했던 것처럼 많은 나비를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나비를 보는 것만으로도 강원도행은 즐거웠다. 특히나 나비를 오랫동안 아껴왔던 이들과 함께해서 더 좋았다.


가장 아쉬운 점은 이때 건진 나비 사진 상태가 썩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산네발나비와 같은 경우는 너무 사진이 흐릿해서 마치 70년대 찍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몇몇 상태가 좋은 나비 사진도 건지기는 했으나 그저 열심히 따라다녔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야만 했다.


만약 시간을 되돌려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내 설렘과 떨림을 다시 돌이킬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이미 나는 그때의 흥분과 열정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어느 순간부터 초보시절의 초심을 잃어버렸다. 나비를 보고 여전히 가슴이 떨레기는 하지만 그전보다는 덜하며 나비에 대한 호기심도 줄어들었다. 강원도를 다녀온 기억이 희미해질 정도로 내 심장은 빛이 바래버렸다.


그래도 내년을 기약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나비는 여전히 내년에도 나올 것이고 또 하늘을 날아다닐 것이다. 봄이면 봄대로 여름이면 여름대로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할 것이며 출사 나선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 것이다. 나도 내년에는 나비를 보는 눈도 키우고 사진에 담아내는 실력이 올해보다는 조금 더 나아져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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