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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새기다

by 산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통 코로나 뉴스와 관련되지 않은 게 없었다. 세상의 흐름은 멈추었고 모든 것은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그 무렵 낯선 이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번에 전통문화 판각 프로그램이 열립니다. 혹시 지금도 생각 있으세요?


전주완판본문화관에서 열리는 판각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였다. 이전에 그 곁을 지나가다가 전화번호를 남기고 온 적이 있었다.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인데 이제야 연락이 온 것이었다. 당장 참가하겠다는 답을 하였다. 나무에 글을 새기는 일이야말로 살면서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었다.


이전에는 30명 단위로 모집을 했으나 이번에는 코로나로 A반 10명, B반 10명만 모집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나마 예전에는 그런 행사조차 할 수 없었으니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만도 어디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강일 간단하게 모여서 행사 진행과 관련한 소개를 받았다. 대략 3시간씩 10차시로 진행된다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지급해야 할 비용은 나무와 조각도를 구입하는 정도만 든다는 이야기가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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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각과 서각에 대한 이론을 배우고 조각도 만들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자신만의 조각도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멋진 작업이다. 칼을 나무에 박고 밀리지 않도록 조각도에 실을 감고 마무리까지 하니 조각도 네 개가 생겼다. 내 인생에 처음 가져보는 조각도였다. 어린 시절 조각도로 판화를 만들기는 했지만 나무에 새기는 것은 난생처음이다.


나무에 칼을 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가장 큰 걱정은 글을 새길 때 잘못해서 엉뚱한 곳에 칼날이 지나가거나 글자가 망가지는 일이었다. 우리는 먼저 조각도를 다루는 법, 그리고 양각과 음각에 대해 배우면서 글자 새기기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양각의 느낌과 음각의 느낌은 또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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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장님의 양각 지도


순백의 은행나무에 조각도가 닿는 느낌은 백지에 글을 쓰는 것과 유사하다. 조각도를 45도 정도 세워서 진행하면 나무가 경사지게 잘린다. 반대쪽도 같은 방식으로 하고 마지막 마무리는 하면 나무가 똑하고 떨어진다. 조각도가 지나갈 때마다 매끈하게 글자가 떨어지면 기분이 좋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글자가 깨끗하게 나오지 않고 일부가 남기도 했다. 이럴 경우에는 다시 한번 더 조각도가 지나가야 한다.


선배들이 한 것을 보면 매끈하고 보기 좋은데 내가 한 것을 보면 선도 고르지 않고 매끈한 맛이 없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나무에 글을 새기는 일도 시간과의 싸움이다. 천재가 아닌 이상 들인 노력에 실력도 따라가는 것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가야 하는 일이니 하고 마음을 다독였지만 마지막까지 완주할 자신이 없었다. 다른 이들 작업하는 걸 보면 시원시원하게 나무를 잘 다룬다. 그래도 빠지지 않고 다니다 보니 어느새 수업이 끝나는 시점이 되었다.


수업 마지막 완결은 한 작품씩을 해서 채색까지 끝내는 일이다. 거의 빠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일이 더디다 보니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일주일을 남겨 두고는 실장님의 양해를 얻어 하루에 대여섯 시간을 작업하는 강행군을 진행하였다. 작업은 힘들었지만 묘한 매력이 있어서 한 번 시작하면 중간에 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때는 작업을 하다 보니 새벽 2시까지 할 때도 있었다.


다행히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다 보면 선배님들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조각도를 다루는 법, 마무리하는 방법 등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쌓이자 처음에 막막하기만 했던 단계에서 벗어나 조금씩 조각도가 손이 익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걸 어찌 끝내나 싶었으나 여러 분들의 도움 덕분에 잘 마칠 수 있었다.

KakaoTalk_20211002_081022682.jpg 전주완판본문화관에 전시 중인 작품



이제 11월에는 시를 소재로 하는 우리 기수들의 소박한 작품전이 열린다. 자신이 마음에 드는 시를 한 편 내지 한 구절씩 택하여 작업하는 일이다. 이때 전 회원이 참여하여 공동작품을 만들게 되는 데 내가 쓴 시로 그 공동작품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 작품전을 위해 쓴 <나무를 읽다>라는 작품이다.

나무가 숨겨 놓은 길을 따라 걷는다

골은 깊고 험해서 발을 잘못 디디면 바로 낭떠러지다

나무라는 게 길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잘 들여다보면 물이 흐르고 계곡이 있고 산이 있고

그리운 사람이 거기 있다

나무에 살포시 칼을 대자

빼곡하게 숨어 있던 말이 툭, 쏟아져나온다

한 획이라도 떨어뜨릴까 정성스럽게

나무 고랑을 파서 옮긴다

저 나무는 얼마나 오래 기다렸을까

스무날의 낮과 밤,

스무 해의 밤과 낮을 이기며

글 한 자를 만나기까지 또 서성였을까

한참을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덜 옮긴 글자가 한가득이다

나무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도 나무도 하나다

날 선 칼끝이 오늘따라 시원하다



앞으로 10월 내내 저녁마다 가을의 설렘을 가지고 판각을 할 것이다. 또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 마치고 나면 올 가을 나만의 선물을 받은 느낌이리라. 그리고 조금 더 나무에 글을 새기는 일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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