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안군 자은도 분계해수욕장
일행 중 한 명이 분계해수욕장을 권한다.
1004 대교를 지나 30분 정도면 간다는 말에 서둘러 길을 나서기로 했다. 분계해수욕장은 신안군 자은도에 있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신안까지는 꼬박 왕복 400킬로이다. 이런 길을 당일로 와서 간다는 게 조금은 아쉽고 서운하다. 내심 하루를 묵을까 생각하기도 했으나 나는 이내 마음을 접기로 한다. 준비를 하지 않고 오는 바람에 충전기 때문에 고생을 했다. 사진을 찍다 보니 핸드폰 배터리가 방전되어버렸다. 차에서 충전을 하기는 했으나 충전 속도는 1~2%를 넘나들 정도로 느리다. 출발하고 싶어도 핸드폰 내비게이션이 되지 않기 때문에 달리 어디를 갈 수도, 딱히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1004 대교에서 분계해수욕장까지 오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가는 군데군데 해수욕장 표지판이 보인다. 신안처럼 해수욕장이 많은 동네는 해수욕장 순례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그마한 분계해수욕장은 포근하고 아늑했다. 휴가철이 끝나서인지 소나무 숲이 자근자근 밟히는 분계해수욕장은 한적했다. 광주에서 왔다는 부부만이 소탈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소나무 숲 아래로는 그림 같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인적이 끊긴 해수욕장에서는 자연 그대로 날것의 냄새가 난다. 사람들이 오가지 않아 순백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백사장이 거기 있었다. 나는 해변으로 뛰어가고픈 충동을 애써 참았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앞뒤 가릴 일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저것을 재다 보면 놓치는 일이 많다. 여름밤과 달리 가을의 해는 짧다. 여름철이라면 지금도 해가 한참 남아 있을 것이다. 여인송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정재준 님은 준 지금이야말로 분계해수욕장이 가장 아름다울 때라고 힘주어 말했다. 봄철에는 산 쪽으로 해가 지지만 지금은 소나무 숲 가운데로 해가 떨어진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하필 내가 갔던 날은 날이 흐려서 석양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나는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림짐작해보기로 했다. 아, 바다가 해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아름답지 않은가.
사진 제공: 여인송 정재준
소나무 숲 앞에서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왼편으로 섬 하나가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바다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느낌이었다. 저녁 어스름을 간직한 바다를 지켜보는 일이란 언제나 묘한 느낌이 든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뿐인데도 빛의 변화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마침내 빛이 섬을 삼켜버리면 그다음을 차지하는 건 파도소리뿐이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쉬워지는 건 눈을 잃어버리고 귀를 얻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이곳에 올 기회가 된다면 달밤에 해변을 걸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에는 자디잔 모래에 발을 맡기고 바닷물이 발을 찰랑찰랑 대는 느낌을 오래 맛보고 싶다. 카페의 잔잔한 음악은 내가 가을 해변에 있다는 느낌을 실감 나게 해 주었다. 이곳에도 겨울에는 사람이 별로 찾지 않을 것이다. 흔히 해수욕장이 여름 한철 장사라지만 이렇게 좋은 해수욕장을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는 것은 여간 서운한 일이 아니다. 반대로 사람들로 북적이는 것도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일이기도 하다. 그저 적당히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좋은 이들이 이곳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면 좋지 않을까?
카페의 음악은 끝나가고 있었다. 실제로 여름철이 지나면 7시쯤 문을 닫는다고 했으니 착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수의 노랫소리는 구슬펐다. 아마도 피서객이 몰리는 여름철이었더라면 분위기 있는 카페는 제법 손님으로 차 있었을 것이다. 혼자가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그래도 여기서라면 나쁘지 않았다. 흘러나오는 여가수의 목소리는 촉촉했다. 만약 여름이었더라면 조금은 더 분위기가 있게 느껴졌을 법한 목소리였다.
50명은 충분히 들어갈 만한 카페에 손님은 나 혼자였다. 이 넓은 카페를 나 혼자 독차지하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작년에 생겼다 한다. 하필 코로나 시국에 오픈을 하다니. 운이 지지리도 없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분계해수욕장에 잠시 머물렀다는 가면서 또 새로운 곳을 알게 되었다. 사람 일이란 게 원래 기약 없는 일이지만 이런 인연은 또 반갑다.
핸드폰 충전이 어느 정도 될 때까지 나는 꼼짝없이 여기에 묶여 있어야만 했다. 대신 나는 섬의 밤을 조금만 더 누리다 가기로 했다. 어차피 집에는 늦을 것이다. 밤에 만나는 섬이란 또 어떤 맛일까 궁금해졌다. 사실 나는 밤에 섬을 다녀본 기억이 거의 없다. 대부분 낮에 다녔다. 밤의 섬은 발길을 놓치기 쉽다. 어둠 아래 어떤 바다나 절벽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법이다.
섬을 밤에 운전하는 일은 더더욱 낯설다. 밤에 먼 길을 나서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3시간 넘게 운전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이 침침해지고 몸이 노곤해진다. 이럴 때는 그냥 여기에 주저앉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여행지에서 항상 느끼는 생각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면서도 부담스럽다. 오늘 같은 날에는 더더욱. 하루쯤 이 낯선 곳에 몸을 맡겨도 나쁘지 않을까? 회 몇 점을 싸들고 바닷가에서 못하는 술이라도 한 잔 해도 좋지 않을까?
낮에 섬을 다니다 보면 파란 바다에 눈을 빼앗기는 일이 흔하다. 하지만 밤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밤의 섬은 좀 더 조용하고 음전하다. 말을 건네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로 섬은 온통 침묵에 잠겨 있다. 내가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 분계해수욕장과도 이별을 해야 한다. 내가 떠나고 나면 이 한적한 해수욕장은 어찌 될까? 아마 바다는 더 푸르러지고 깊어지겠지. 그리고 해수욕장에는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분계해수욕장이야말로 이 가을에 내가 만난 신안의 숨겨진 아름다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