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는 식물을 공부하러 부지런히 다녔다. 올해 초에 야외 탐방에서 산자고를 만난 게 계기였다. 바다를 배경으로 피어 있는 산자고의 자태에 푹 빠진 나는 모임이 있으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따라나섰다. 혼자 하루에 두 군데 산을 다녀온 적도 있었고, 수시로 전주수목원과 대아수목원을 다녀오기도 했다. 문제는 내가 식물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산에 오르면 모르는 나무 이름들이 나를 덮쳤다. 산에 들어서면 아는 식물 대신에 모르는 식물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모르고 살 수 있었나 하는 마음에 몇 번이고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붙잡아 준 건 꽃다지에서 활동하는 박형근 선생이었다.
그 말이 터무니없는 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지 않았다. 부지런히 좇아 다녔지만 실력은 좀체 늘지 않았다. 여전히 내게 식물은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였다. 그럼에도 매주 시간이 날 때마다 전국을 돌아다녔다. 올 한 해 동안 강원도를 여섯 번이나 가고 울릉도와 제주도까지 부지런히 다녔다. 매주 토요일마다 무주 덕유산으로 나비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지난 10년간 내가 다닌 곳을 다 합친다 해도 올해만큼 많이 다니지는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신기하게도 식물을 보면 하나 둘 이름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누군가 식물 이름을 말하면 한 번쯤은 들어봤던 경우가 점차 많아졌다. 꽃과 나무 사진만 2만 장 이상을 찍는 바람에 내 핸드폰에는 꽃과 나무, 그리고 나비 사진이 넘쳐났다. 아는 식물들이 많아진다는 사실은 생소하면서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박형근 선생이 말했던 게 영 빈말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비로소 식물을 내 곁에 둘 수 있었다.
올해 나는 처음으로 시작한 게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판각이다. 예전부터 나무에 글을 새기는 모습이 좋아 보여서 신청해두었는데 마침 완판본문화관에서 연락이 왔다. 매주 빠지지 않고 다닌 덕분에 무사히 수료를 할 수 있었고, 지금은 동기들과 작품전을 준비하는 중이다.
나무에 글을 새길 때면 마음이 설레면서도 바쁘다. 하지만 마음을 다스리고 나무와 친해지는 일이야말로 판각에서 가장 중요한 첫 작업이다. 이 작업이 서투르면 나무는 좀처럼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 마음이 급하면 새긴 글자가 깨지거나 지저분하게 보이는 것은 물론이다. 그에 비하면 마치 기계로 파낸 것처럼 깨끗하게 나무를 다룬 작품도 있다. 그런 작품을 만날 때면 생각한다. 그는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얼마나 오랜 노력을 기울였을까 혼자 가늠해보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판각 작업처럼 시간이 온전히 들어가는 일이 많지 않다. 나무 앞에 앉아 칼을 잡으면 민화를 그릴 때와 비슷한 몰입도가 생긴다. 한 번 앉으면 서너 시간은 기본이고 거의 열 시간 이상을 작업한 적도 여러 번 있다. 아쉬울 때도 있다. 붓 한 번에 민화 작품이 망가지는 것처럼 판각 역시 순간의 실수로 획이 사라지기도 한다.
최근에 작품전을 준비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서화관에서 나무에 글을 새기다 보면 한편에서 작업하시던 9기 선배 박계현 선생님이 와서 말을 건넨다.
손이 쥐어지지 않을 정도로 진이 빠져 있는 상태에서 이런 말을 들을 때면 한껏 움츠려있던 몸에 힘이 생긴다. 처음 판각을 시작했을 때, 다른 이들에 비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실력을 탓하며 한동안 힘들었다. 동기 중에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이들이 여럿 있었으나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꾸준히 나무를 만지고는 있었으나 마음처럼 깔끔하게 선이 나오지 않았다.
계속해야 하나 그만두어야 하는 고민의 기로에서 박 선생님의 말은 내게 조금 더 해도 좋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게 해 주었다. 여름을 지나 가을로 가는 길목에서 나는 서화관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박 선생님과 함께 보냈다. 박 선생님은 그 이후에도 내가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을 때마다 아낌없이 조언을 해주셨다. 초보였던 나에게 칼을 가는 법부터 칼을 쥐는 법과 새기는 법까지 본인이 하면서 터득한 비결을 전해주셨다. 나는 마치 무림의 비결을 전수받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나는 엄두가 나지 않던 작품전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나는 인생에서 잊히지 않는 세 명의 목소리를 만났다. 그들의 목소리는 내가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데 도움을 주었고, 식물을 평생 곁에 두게 하였으며 판각이라는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들이 내 인생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듯이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도움을 주고 싶다. 앞으로 나는 또 많은 목소리를 만날 것이다. 그 목소리들과 오래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