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온다. 겨울이 다 가지 않았는데 봄이 온다고, 그러니 이제는 다시 또 살아갈 희망을 노래하자고 꽃이 핀다. 남도에서 반가운 꽃소식이 들릴 때마다 내 가슴은 마구 뛰었다. 올해도 봄이 열리는구나. 코로나 19로 세상이 떠들썩해도, 우리는 죽겠다고 아우성쳐도 어김없이 봄은 또 이렇게 시작하는구나. 다행이다. 참 다행이라며 속으로 헐벗은 마음을 다독였다.
2월이 중순을 훌쩍 넘긴 어느 날. 우리는 부안으로 향했다.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변산바람꽃. 바람꽃의 종류는 많지만 변산바람꽃에 한 번 빠진 이들은 다른 꽃에 쉽게 눈을 돌리지 못한다. 세상에 예쁘지 않은 꽃이 있을까 싶지만 한겨울을 이겨낸 변산바람꽃을 마주하는 감동은 남다르다. 순백의 바탕에 노란 꽃잎이 정결하고 가지런하게 자리한 변산바람꽃을 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다.
미나리아재빗과의 초본식물인 변산바람꽃은 1993년에 학계에 처음으로 보고된 한국 특산종으로 지역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이 꽃을 처음 본 이는 꽃받침을 꽃잎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은 꽃받침이 꽃잎과 수술을 받치고 있다. 꽃받침 안쪽의 수술과 섞여 깔때기 모양으로 솟아오르는 게 꽃잎이다. 변산바람꽃의 꽃잎은 적게는 4개에서 많게는 10개까지 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변산반도, 마이산, 지리산, 한라산, 설악산 등지에서 자생하고 있지만 개체수는 많지 않다. .
세상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꽃이 많다. 진한 향기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꽃도 많다. 하지만 어떤 꽃들은 수수함으로 더 깊이 와닿기도 한다. 대개의 바람꽃은 순백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렇게 맑은 영혼의 얼굴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바람꽃을 볼 때마다 혹시 하얀 눈이 준 선물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하얀 눈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 그 마지막 흔적을 이 꽃에 아로새기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는 것이다.
눈이 오기 시작하면
변산바람꽃은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
눈이 오는 건
겨울이 끝나간다는 의미이고
이제 봄이 올 테니
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언젠가 때가 오면
나도 겨우내 가슴에 품어두었던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줄 것이다
변산바람꽃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사람들은 봄이 왔다고 말한다
- 변산바람꽃 이야기
히말라야 사는 아이들은 ‘차다’라고 불리는 얼음길을 지나 학교에 간다. 설산에 아련하게 가는 실처럼 이어져 있는 길이 그들에게는 미래의 꿈으로 가는 통로이다. 차다에는 낮에도 영하 20도의 매서운 추위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아이들이 학교로 가는 길은 춥고 길을 가다 보면 물에 빠져 발이 꽁꽁 얼기도 한다. 운이 좋지 않으면 눈사태를 만날 수도 있다.
나는 변산바람꽃이 눈밭을 헤치고 세상에 오는 길이 이 ‘차다’와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변산바람꽃이 세상으로 나오는 길은 험하고 춥고 외로웠을 것이다. 어쩌면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들이 이 험준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준 덕분에 우리는 한겨울에 눈부신 봄을 엿볼 수 있다.
가만있어도 추운 날씨에
사내들이 바지를 홀딱 벗고
장화 신은 맨발로 얼음강으로 나선다
히말라야의 강물은 빠르고
그 속도만큼이나
적응하기 힘든 추위가 살을 파고든다
히말라야의 얼음강에서
아빠는 맨살이 허옇게 드러난 다리로
아이를 업고 물을 건넌다
히말라야에서 평생을 살아온
아빠의 앙상한 다리가
아이들에게는 세상으로 가는 다리이다
하루 종일 지친 아이들이 추위 속에서 잠이 들고
어른들은 그들의 이마를 짚어준다
히말라야 차다에서는 별이 더 환히 빛난다
- 학교 가는 길
아내는 변산바람꽃을 처음 보았던 때의 강렬한 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냇가에 흐드러지게 핀 변산바람꽃이 바람에 일렁이던 모습을 이야기할 때 아내의 목소리는 잠시 흔들렸다. 그 아름다운 자태를 상상하기만 해도 이렇게 마음이 떨리는 데 직접 눈앞에서 그걸 보았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누군가에게 어떤 꽃의 첫인상은 강렬하고 눈부시며 때로 가슴 아리다. 감히 단언하건대 누구라도 바람꽃을 마주한 이라면 그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변산바람꽃의 가녀린 꽃대가 땅을 뚫고 나오는 것도 신비로운 일이지만 때를 맞추어 피는 일이야말로 경이롭다. 하필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필 일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주니 바라보는 이로서는 눈물이 날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변산바람꽃은 한겨울 추위를 이기고 필 것이다. 변산바람꽃은 매서운 추위를 이기고 나서야 봄이 온다고, 지금은 다들 힘들고 외롭고 고달프겠지만 이 봄이 지나고 나면 조금은 더 따뜻한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 봄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변산바람꽃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