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흔한 새 이야기,

by 산들


우리나라에는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라는 속담이 있다. 나는 50년 넘게 살아오면서 뱁새가 무슨 새일까 궁금해 본 적이 없다. 사는 과정에서 이 속담을 자주 쓰면서 살아왔음에도 뱁새에 대해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니 이상한 일이지만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황새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 뱁새는 그보다는 한참 작은 새려니 생각만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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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이 뱁새의 정체를 알았다. 알고 보니 뱁새의 정체는 붉은머리오목눈이였다. 이 새는 관목이나 덤불, 갈대밭 등지에서 10~20마리 또는 30~40마리씩 무리 지어 바쁘게 움직이면서 시끄럽게 울며 돌아다니는 습성 때문에 수다쟁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또한, 몸놀림이 무척이나 빠르며 움직일 때 긴 꽁지를 좌우로 흔드는 버릇을 가진 새이다. 붉은머리오목눈이는 한 마리가 날기 시작하면 동시다발적으로 한꺼번에 방향을 잡아 함께 날아다니는 속성이 있다. 이때는 이동하는 새의 동작이 워낙 빨라서 순간 포착으로 사진에 담기에 어렵다. 있다.


이 뱁새와 함께 등장하는 황새는 또 어떤가. 천연기념물 199호로 정해진 황새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가 아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적이 있으나 지금은 겨울철에 가끔 볼 수 있다. 보통 황새는 논이나 강 주변에서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가끔 전봇대에 앉아 있는 경우도 있다.


새와 관련한 또 다른 속담으로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등이 전한다. 까마귀는 지명에도 등장한다. 충남 보령에 있는 '오서산(烏捿山)'이라는 지명은 '까마귀의 보금자리'란 뜻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우리 속담에 등장하는 까마귀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서양도 까마귀에 대해서는 비슷한 모양이어서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전쟁 혹은 불화의 기마여행>에도 몸을 쪼고 있는 까마귀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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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루소, <전쟁 혹은 불화의 기마여행>


까마귀 그림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 있다. 바로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다. 고흐 특유의 강렬한 붓터치가 황금으로 출렁이는 밀밭과 그 위를 나는 까마귀떼로 분출하고 있다.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죽음의 그림자를 떠올리곤 한다. 고흐는 우와즈에서 이 그림을 그리고 얼마 후에 생을 마감했다. 실제로 우와주에 묻혀 있는 고흐의 무덤 주위에는 광대한 밀밭이 그림처럼펼쳐져 있어 죽기 전까지 마지막 영혼을 불태웠던 작가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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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


하지만 고대에는 까마귀가 신성한 새이기도 했다. 중국에서 신성하게 여겼던 삼족오(三足烏) 또는 세발까마귀는 고대동아시아지역에서 태양 속에 산다고 여겨졌던 전설의 이다. 우리나라의 씨름무덤(각저총), 쌍영총, 천왕지신총 등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도 삼족오가 많이 그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설에도 까치와 까마귀 이야기는 종종 나온다. 그 유명한 ‘연오랑(燕烏郞)과 세오녀(細烏女)’의 이름에도 까마귀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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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까마귀를 선악과 결부시켜 다루면서 이미지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흑백논리라는 개념에서 알 수 있듯이, ‘희다’를 선과 결부시키는 대신 ‘검다’를 악과 동일시하는 정서가 반영된 결과이다. 하지만 까마귀 역시 오늘날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새가 아니다.


얼마 전 야외에서 큰부리까마귀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다. 머리 위에서 날고 있는 모습이 마치 맹금류처럼 당당한 멋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새와 달리 마음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내 마음 밑바닥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선악의 경계, 흑백논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처럼 살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공동 문화배경의 힘은 내가 쉽게 뿌리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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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도심에서 떼까마귀의 출현이 화제가 되기도 한다. 지자체에서는 떼까마귀가 출몰한 곳을 제공할 때 커피 쿠폰을 주거나 사진 한 장에 500원의 현상금을 내건 곳도 있다. 길을 가다 전선줄에 줄지어 늘어선 까마귀를 보고 있노라면 소름이 끼친다. 비록 거리가 멀다 해도 ‘떼’가 주는 중압감이 나를 덮치기 때문이다. 아마 그런 배경에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라는 영화가 자리하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메뚜기나 새이거나 무리로 달려드는 것들은 치명적인 공포와 선이 닿아 있다. 그 공포의 끝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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