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의 대표적인 명소인 퍼플 섬을 만나러 가기 위해 참 오래 기다렸다. 물론 이전에도 다녀올 수 있었으나 좀 더 느긋한 시간에 만나기 위해 일부러 오래 참았던 참이었다. 그렇게 기다렸건만 하필 퍼플 섬에 가던 날은 하늘이 잔뜩 흐렸다. 천사대교에서 만난 문화해설사님은 퍼플 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 같은 날씨에 퍼플 섬에 가시면 몽환적인 느낌을 받으실 거예요!"
그래서였을까? 퍼플 섬을 찾아가는 내내 이 말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기는 그랬다. 보라색은 쉽사리 소화하기 힘든 색이다. 하지만 그만큼 매력적인 색을 찾기 어려운 색이기도 하다. 퍼플 섬은 이 보라색을 테마로 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몽환적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날을 제대로 잡은 셈이다. 몽환적이라면 햇살이 쨍쨍 내려쬐는 날보다는 이런 날이 제격이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천사대교에서 30분가량 걸리는 퍼플 섬으로 가는 길은 설레는 마음이었다. 가는 곳곳에는 퍼플 섬이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에 선정되었음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사실 방송을 접하기 전에는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을 뽑는 행사가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터였다. 고창 운곡습지와 더불어 신안 퍼플 섬이 꼽힘으로써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유명세 때문에 가는 길이 막히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아직 덜 알려서인지 그러지는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특산물 판매장에서 다시마를 구입했다. 신안을 대표하는 여러 특산물이 있지만 신안 너른 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대파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장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은도의 <무한의 다리>에 갔을 때는 대파와 섬초를 샀던 기억이 있다. 산지에서 막 뽑았는지 아내와 나는 그 싱싱함에 한 번 놀라고 저렴한 가격에 두 번 놀랐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번에 찾은 퍼플 섬은 무한의 다리가 있는 둔장해변과는 반대 방향이라 아쉬웠다.
주차장에서 200미터쯤 거리에 있다는 매표소로 가다가 이게 맞나 싶어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분명히 매표소 화살표가 선명한 플래카드를 보고 그 방향으로 가기는 했으나 이게 입구로 가는 길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설펐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가는 내내 이 길이 맞나 싶었기 때문이다. 매표소를 지나자 드디어 퍼플교가 나왔다. 눈부신 보랏빛을 머금은 다리가 바다 위에 놓여 있었다.
왜 의류를 대여하는 곳이 있는지는 바다 위를 걸어 보면 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겉옷 한 장이 그리워진다는 걸 아는 이가 있었나 보다. 만약 다리 위에서 비라도 만나면 그런 낭패가 없다. 비를 피할 수도, 어디 머무를 수도 없다면 온몸으로 다 받아야 한다. 입장료는 오천 원이지만 바다 위를 걷다 보면 그게 싸게 느껴진다. 거짓말 않고 조금 더 내고 싶어 진다.
내 눈앞에는 퍼플교라고 이름 붙인 다리가 있었다. 그런데 진짜 바다 전체에 다리를 놓을 줄도, 그리고 그 다리를 보라색으로 채울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이런 환상적인 생각을 누군가가 했을 것이다. 이런 멋지고 유쾌한 풍경을 우리나라에서 만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보라색이라니. 그래서인지 이 다리를 걷는 내내 즐거운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길을 걷다 보니, 눈앞에 거대한 섬이 있다. 박지도이다. 잠깐 잊고 있었다. 내가 지금 섬에 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지금 바다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눈앞에 보이는 섬이라도 예전에는 배로 이동을 했을 것이다. 그 섬이 지금은 다리로 이어져있을 뿐. 아마 급한 사람들은 배를 기다리느라 속 터질 때도 있었으리라.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운 마음에 바다로 한달음에 뛰어들었을 수도 있다.
마침 신안 퍼플 섬이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에 선정된 걸 기념하는 사진전이 열리는 중이었다. 친구, 가족들과 퍼플 섬을 찾은 사람들이 보라색 옷을 차려 입고 즐거운 표정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거기서 만난 사진 한 컷. 어린 왕자의 한 장면이 반월도라는 조형물과 함께 멋들어지게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눈발이 날리는 날이었는지 분위기가 근사하다.
다리를 걷다 보면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다. 대략 1시간 남짓한 거리이니 느긋한 마음으로 걸어야 한다. 중간에 돌아가느니 이왕 길을 나섰으니 마무리를 해보는 것도 좋다. 다리를 걸으면서, 주변 바다를 보면서 그동안 속도에 내몰렸던 자신에게 여유를 돌려주는 것은 어떨까? 호수 데크길이 하더라도 만들기가 제법 힘들었을 텐데 바다 위에 철근 기둥을 박고 다리를 놓는 공사는 또 얼마나 대공사였을까?
슬슬 지겨움이 밀려들 무렵, 박지도에 도착했다. 퍼플교는 반월도와 박지도를 잇는 다리이다. 알고 보니 박지도에는 900년 우물과 당산이 매력적인 곳이었다. 가볼까 하다가 마음을 접었다. 이미 상당히 시간이 늦은 터라 우물까지 다녀오고 나면 밤길을 기야한다. 대신 다음에는 좀 더 일찍 와서 박지도만 찬찬히 둘러봐야겠다고 다짐했다.
퍼플 섬의 포토존
시간이 늦어져서인지 다리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진으로 보았을 때의 근사함을 떠올렸으나 사진만큼은 아니었다. 그래도 운치 있는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사람이 떠난 다리는 할미새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 십여 마리가 다리와 갯벌을 오가며 놀고 있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바다 하면 갈매기를 떠올릴 텐데, 할미새라니. 내 아쉬움이 짙어질 무렵 퍼플교 순례는 끝났다. 나는 다리를 건너는 내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다리 위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일로 머리가 복잡할 때
오래 묵혀둔
파도 속살 같은 바다 이야기를
바다 위에서 들을 수 있는 섬이 있다
베드로는 아니지만
검푸른 바다를 걷다 보면
파도가 갯벌로 바뀌고
섬이 뭍으로 변하는 기적이 열린다
다 끝나고 나서도
더 이야기가 듣고 싶은 그런 섬이 있다
한 번 가서는 다 들을 수 없고
가슴 한켠을 비워야 만날 수 있는 그런 섬이 있다
신안에는
- 신안 퍼플섬
봄이면 신안은 꽃 축제로 화려하게 변신을 한다. 남도의 봄을 알리는 꽃들이 섬에 지천으로 피어난다. 화사한 봄을 머금은 퍼플교의 느낌은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사람들이 이 멋진 곳을 더 많이 찾기를 바란다. 주말이면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나서는 것은 어떨까 싶다. 그리하여 이 봄에는 신안 바다 위에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