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과 사이

by 산들

얼마 전 제주도 식물탐사 중 한라생태숲에서 있었던 일이다. 예전에 갔던 한라생태숲에 대한 인상이 좋아서 이번에도 기대를 했던 터였다. 박형근 선생과 함께 지난번에 걷지 못했던 곳까지 두루두루 돌면서 숲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야생화를 구경하고 돌아 나오던 길목에서 수녀님 두 분을 만났다. 그런데 초행이나 다름없는 우리에게 길을 물어보시는 게 아닌가.


혹시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가요?

글쎄요. 저희도 초행이라서요. 대신 저희가 온 길로 가면 새우란을 볼 수 있답니다.

아, 새우란요!


내가 전날 찍었던 새우란을 잠시 보여드렸더니 수녀님이 몹시 좋아하셨다. 두 분 수녀님은 제주도에 잠시 쉬러 오셨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수녀님 한 분이 전주 모 학교에서 4년 정도 근무하셨다고 하신다. 객지에서 전주와 남다른 인연을 맺은 분을 만나다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고향 이름만 봐도 반갑다고 하지 않던가. 갑자기 수녀님께 무언가 선물을 드리고 싶었다.


수녀님, 오늘 여기 오시면서 드신 생각이 있으면 한 단어로 이야기해보실래요?

한 단어요? 글쎄요.

어렵게 생각 마시고 그냥 어떤 단어가 떠오른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하기는 여기 오면서 ‘멈춤’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기는 했어요.

그럼 제가 그걸로 시 한 편을 선물로 드릴게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시요?


내 이야기를 듣던 수녀님의 눈동자가 커졌다. 하기야 낯선 곳에서 이런 뜻밖의 일을 생각이나 하셨겠는가? 나로서도 즉흥시는 쉽게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두 분의 선한 기운과 한라생태숲의 도움을 받는다면 가능할 법도 했다.


한라생태숲에서 잠시 삶을 멈춘다

내가 왔던 길 내가 가야 할 길이 하나로 만나

바람과 숲과 하늘과 땅이 여기에 함께 있다

길 가는 길목마다 길 아닌 데 없고

나무 아닌 데 없다

눈을 감아도 들리는 것은

내 삶이 걸어온 길뿐

여기 잠시 나를 내려놓고 침묵으로 걸어간다.

숲이 나를 안아준다

지친 나를 꼬옥 안아준다

- 멈춤, 그리고 사이


수녀님이 딱 지금의 마음이라면서 무척이나 반가워하신다. 수녀로 외길을 걸어오며 지쳤던 당신의 마음을 알아준 것에 대한 반가움이었을까. 불과 10분 남짓한 시간이었으리라. 각기 다른 지역에서 온 두 팀이 제주도에서 만나서 이런 대화를 나눌 일이 얼마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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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님 두 분은 내일 사려니 숲으로 가실 예정이라는 말과 함께 우리가 걸어온 길로 사라지셨다. 나 역시 큰 선물을 받는 느낌이었다. 한라생태숲에서 만난 아름다운 야생화와 식물 탐사도 좋았지만 두 수녀님의 밝은 미소를 잊을 수 없다. 오르막길을 오르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우리는 한라생태숲을 나와 절물휴양림으로 향했다. 나는 앞으로 한라생태숲을 찾을 때마다 환하게 빛났던 5월의 어느 날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선물처럼 다가온 그 인연을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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