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히 작가에 대해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의 몇 작품을 보았다고 그의 실체까지 안다는 말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한때 <우동 한 그릇>으로 유명한 작가 구리 료헤이에게 흠뻑 빠졌던 적이 있었다. 읽을 때마다 가슴이 저며오는 작품이라서 읽다 보면 저절로 눈물이 나기도 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상당히 심했다고 할 수 있다. 기회가 되면 일본에 가서 작가를 직접 만날 생각까지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물론 오해일 수도 있으나 기사 내용만 봐도 작가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다. 여전히 <우동 한 그릇>에 대한 좋은 인상은 남았지만 작가를 생각하면 다시 혼란스러웠다. 작가가 그런 인생을 살았다고 해서 작품까지 도매금으로 내몰 수는 없었다. 이런 일은 참 고통스럽다. 작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작가를 버릴 수는 없다. 이럴 때는 차라리 ‘무명’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이 당혹스럽다. 작가와 작품을 냉혹하게 분리해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작가가 작품을 쓰는 일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작가는 세상에 없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존재이다. 그러니 작품이 어찌 쉽겠는가. 작품이 나온 이후 결과물은 온전히 작가만의 것이 아니다. 독자가 결부되면 관계는 좀 더 복잡해진다. 작가가 자신의 분신처럼 만들어놓은 작품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새 생명을 얻는다. 비록 작가가 창조자이지만 스스로 생명력을 얻은 작품의 운명은 어쩔 수는 없다.
어쨌거나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끝까지 책임질 수 없기도 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작가의 작품은 작가가 포기를 선언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절판된 책조차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이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진퇴양난이자 어쩔 수 없는 비극이다. 죽는 날까지 바위를 꼭대기까지 올리는 일을 해야 했다는 시지프 신화처럼 작가는 자신에게 닥친 슬픈 현실을 피할 수 없다. 작품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작가는 어떤 식으로건 자기 작품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경우, 자신이 죽으면 작품을 불태워달라고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물론 부탁을 받은 이는 무책임하게도 그 약속을 어겼다. 덕분에 우리는 카뮈의 작품을 보고 있다. 이런 유혹은 카프카만 받았던 게 아니다. 우리나라 허난설헌의 경우에도 자신이 죽으면 작품을 불태워달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동생 허균 역시 무책임했다. 심지어 허균은 누나의 시를 모아서 책으로 발간까지 했다. 만약 말을 들은 이들이 좀 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들은 왜 자신의 작품을 불태워달라고 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세상이 덧없고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미 쓴 작품에 대한 회의가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자신이 죽을 때 자기 작품을 데려가고 싶은 것이다. 아마 이 시점에서 의문이 들 것이다. 왜 작가는 자신의 손으로 작품을 없앨 수 있는데 다른 이의 손을 빌리고자 했을까.
여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양가적인 느낌이다. 자신이 사라지고 남은 세상에 자신의 작품을 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그 이면에는 그 작품이 살아남았으면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자신이 불태우면 간단할 것을 다른 이에게 일부러 부탁하는 이유이다. 이 과정에서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음으로써 작품에 얽힌 이야기는 다시 또 다른 전설을 낳는 도구로 쓰인다.
어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목숨을 걸기도 한다. 병을 치료하는 대신에 작품에 매달림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기도 한다. 소설가 최명희가 그랬다. 만약 작품을 중단하고 치료를 했더라면 결과는 어땠을까?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을까? 가정은 없지만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작품은 목숨과 바꾼 작품이라는 말도 가능하다. 대체 작품이 무슨 의미를 지니기에 작가들은 이렇게 무모할 정도로 지독한 애착을 보이는 것일까.
아마 그들이 그렇게까지 작품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유한한 대신 작품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우리야 100년을 살기에도 벅차지만 작품은 수백, 수천 년을 살아남기도 한다. 때로 어떤 작품은 한 인간의 인생을 바꾸기도 하고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기도 한다. 때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일이야말로 실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작가들이 그토록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작품에 매달리는 이유는 당연하다. 나 역시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때로 어떤 작가들은 죽을 때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기도 한다. 그 왕성함이란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다. 폭발적인 에너지를 따라잡기란 불가능하다. 70대에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는 화가, 80대에도 신작을 낼 수 있는 작가. 이런 이들을 생각하면 아득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보고 있으면 앞으로 10년 정도 부지런히 달려가다 어느 접점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이나 나에게도 아직은 시간이 있고 기회는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