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선물, 베트남 사파

by 산들

여행을 다니다 보면 기대만큼 못해서 실망하는 곳도 있고, 예상 밖으로 오래 가슴에 남는 여행지도 있다. 내게 사파(sapa)는 후자이다. 베트남 여행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대개 하노이나 다낭, 또는 호이안을 손꼽는다. 사파는 우리에게 익숙한 하노이나 다낭, 하롱베이처럼 여행상품이 많이 개발되어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 가운데 사파를 아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또한, 하노이에서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마음이 있어도 쉽게 가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파를 찾은 이들은 베트남에서 다시 또 가고 싶은 곳으로 사파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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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사파로 가기 위해서는 제법 힘든 고생을 감수해야 한다. 하노이에서 사파까지의 거리는 350킬로.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비용도 만만치 않다. 하노이역에서 밤 기차를 타면 8시간을 달려 새벽 무렵 라오까이역(Lao Chai)에 도착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라오까이역에서 사파까지 다시 한참을 가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밤 기차가 부담스러우면 하노이에서 사파까지 가는 슬리핑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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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에서 사파행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꼭 승강장을 확인해야 한다. 만약 다른 승강장에서 기다리다가 열차를 놓치면 그런 낭패가 없다. 나도 여행사 직원에게 기차역에서 차표를 받기 위해 기다리다 하마터면 차를 못 탈 뻔했다. 4인 침대로 되어 있는 침대칸에서 다른 이의 숨소리와 기침 소리에 뒤척이다 보면 종착지인 사파가 나온다. 새벽에 라오까이역에 도착하면 역 앞에는 사파까지 운행하는 밴이나 미니버스들이 기다리고 있다. 좀 더 편안하게 가고자 한다면 택시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으나 대개는 밴이나 미니버스를 이용한다. 만약 하노이에서 예약했다면 기차 도착시간에 맞추어 마중 나온 안내인이 이름을 부를 것이다. 그 사람을 따라가서 타면 된다. 도착해보니 숨이 막힐 정도로 미니버스는 이미 만원이다.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고향을 가는 이부터 배낭을 맨 여행객까지 고만고만한 사람들을 태운 미니버스는 굴곡진 도로를 한참이나 달려 이른 아침 사파에 도착한다. 잠결에 언뜻 보니 사파 가는 고개 길은 아찔함의 연속이었다. 나는 사파 호라이즌에 머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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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맞이하는 사파의 첫느낌은 한적한 시골 마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평균 해발 1650미터의 사파는 아침 공기부터가 달랐다. 새벽 안개에 휩싸인 사파는 수줍은 새색시랄까. 하노이의 활기찬 모습이나 고즈넉한 다낭이나 호이안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사파에 들린 이라면 규모에 비해 많은 호텔에 놀랄 것이다. 골목골목마다 호텔이 들어차 있어서 이렇게 많아서야 영업이 될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지금도 곳곳에서는 새로운 건축물이 올라가는 데 대부분이 호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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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베트남의 다랭이논 풍경사진을 보았던 이라면 아, 거기 하며 쉽게 고개를 끄덕이리라. 9~10월이면 벼 이삭이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이미 추수를 끝낸 후라 벼 이삭이 출렁이는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그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사파의 대표적인 풍경이라 할 수 있는 계단식 논 풍경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힘을 지녔다. 햇살이 논 위로 스멀스멀 넘어가는 모습은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여행에 나선 여행객을 위로해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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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파에서 내 인생 최고의 호텔을 만났다. 사파 숙소를 검색하다 사람들의 평이 압도적으로 후한 곳을 발견했는데 그게 바로 사파 호라이즌이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호텔은 숙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어렵다. 대개 여행객들은 노곤한 몸을 누이거나 다음 여행지를 위한 중간 거점으로 호텔을 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만약 호라이즌을 찾는다면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지간에 그 이상을 경험할 것이다. 사파 호라이즌은 단순한 호텔 이상의 특별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밤 기차에서 늦게까지 뒤척이며 잠을 청해서인지 아니면 새벽 버스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몸이 엄청 피곤했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몸이 축축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새벽녘 도착한 버스까지 들어온 호텔 매니저의 안내를 따라 호텔 로비에서 수속을 밟는 동안 따끈한 생강차 한 잔이 따라온다. 차가 들어가자 굳어있던 몸이 그대로 사르르 녹는 느낌이다. 그때 호텔에서 제안한 서비스가 아침 샤워이다. 이른 새벽에 도착한 여행객을 위해 간단하게 샤워를 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텔이라니 근사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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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하노이의 신투어여행사를 통해 깟깟마을로 가는 패키지 여행을 신청했건만 약속시간에 가이드는 오지 않았다. 몇십 분을 기다렸건만 끝내 오지 않아 결국 여행사에 연락하여 취소하고 아내와 나는 마을 근처를 탐방하기로 했다. 짐을 맡겨 두고 사파를 둘러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아기자기한 골목이 비오는 풍경을 뒤로한 채 멋들어지게 펼쳐 있었다. 간단하게나마 아침을 먹고 가까운 곳에 있다는 깟깟마을에 먼저 가기로 했다. 깟깟마을은 시내에서 3킬로쯤 떨어져 있는 베트남의 몽족이 사는 전통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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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내리는 비는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전형적인 우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깟깟마을로 가는 길에 보니 등산용품을 파는 가게마다 신발을 보호하는 용도의 비닐로 만든 덧신을 판다. 비가 제법 와서 그런지 도로 위로 물이 한가득이다. 우산을 들었음에도 바지 아래가 흠뻑 다 젖었다. 재미 삼아 비 신발을 사서 신어 본다. 걷다 보니 보기만 그럴싸하지 어느새 신발 쪽으로 물이 마구 들어온다. 거 있지 않은가. 마음만 든든하게 하는 허접한 장비, 딱 그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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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40분 남짓이나 걸었을까. 드디어 목적지이다. 눈 아래로 그 유명한 사파의 다랭이논이 보인다. 논이 풍족하면 좋았으련만 산악지대인 사파에는 농사지을 만한 땅은 충분하지 않다. 그나마 있는 산비탈을 개간해서 논으로 만들어서라도 살아야만 했던 눈물겨운 역사가 오늘날의 이 아름다운 논을 만들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사파를 대표하는 풍경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굽이진 고랑에서 마을 사람들이 한해를 살 만한 먹거리가 나왔을 것이다. 보호지역이기 때문인지 여기는 옛모습 그대로처럼 느껴진다. 천수답은 하늘의 눈치를 봐야하는 땅이다. 인근에서 어떻게라도 물을 끌어올 수 있는 평야지와 달리 산비알에 조성한 논이나 밭은 물에 취약하다. 그래서 산비알의 논은 농사 짓는 사람들의 눈물과 땀을 먹고 자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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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는 베트남 내국인들도 즐겨 찾는 곳이다. 입장료를 내고 아래로 내려가면 깟깟마을의 랜드마크와 같은 사진 찍는 곳이 나온다. 거기에서 우리는 베트남 하노이 대학에 다닌다는 여학생 대여섯 명을 만났다. 하노이에 산다던 학생들은 모처럼 만의 여행이 즐거운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특히, 자매가 사이 좋게 여행을 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하나의 일행으로 깟깟마을 트래킹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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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파스텔톤의 마을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모습은 그동안 바삐 사느라 수고했다고 위로해주는 느낌이랄까. 아내와 나, 그리고 대학생으로 이루어진 우리 일행은 비를 피해 간이음식점에 들렀다. 대학생들과 함께 옹기종기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구운 고구마와 간식을 먹다 보니 어느새 절반쯤 베트남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하염없이 비는 오는데 가게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느긋하기 짝이 없는 우리네 시골 정취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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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머금은 사파의 풍경은 전혀 다르다. 마을 트래킹을 하다가 만난 수차가 그랬고 다리가 그랬다. 흐드러지게 푸근하고 아름다운 다랭이논만 생각한다면 비 온 사파에 그런 이질적인 풍경이 숨겨져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계곡에서 세차게 흐르는 물은 호쾌하다 못해 두려울 정도이다. 이런 물들이 흐르고 흘러 강을 이루며 베트남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젖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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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면 오르막길이다. 깟깟마을을 도는 3시간 남짓한 트래킹의 고단함을 아는지 오토바이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다. 동행했던 학생들은 지쳤는지 택시를 불러 숙소로 가기로 했다. 우리는 그냥 걸었다. 다시 비탈진 경사길을 걸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그런 호사를 어찌 누리랴.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인근 공사장에서 일하는 듯한 부부를 만났다. 그 모습이 묘한 울림을 주었다.



일을 마친 남편을 마중하러 나온 아내가

남편 곁을 차지하고 걷는다

길이 좁지 않은데도 착 달라붙어 걸어간다

남편 허리춤에서 삐져나온 허름한 수건이

아내의 손에 들려진 비닐봉지에 맞춰 춤을 춘다

가끔 실없는 농담이 둘 사이의 어색한 침묵을 깨곤 한다

투박한 남편 손이 닿을 때마다

황토를 닮은 여자가 살짝 자지러진다

좀 멀찌감치 따라가는 게 좋을 뻔했다

부부 덕분에 제법 먼 길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사파의 저녁이 시장하다

- 사파 퇴근풍경


숙소로 오니 매니저가 객실까지 따라 올라와 구석구석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과일 바구니뿐만이 아니라 와인까지 서비스로 받고 나니 하루 더 눌러앉고 싶은 생각이 마구 든다. 일부러 마운틴 뷰를 선택했건만 여전히 산은 뿌연 안개에 싸여 있다. 창을 여니 안개가 조금씩 문을 열어줄 때마다 사파 마을 풍경이 그림처럼 왔다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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