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들 Apr 16. 2023

세상을 여는 출사 여행

- 궁궐로 떠난 여행, 창덕궁 출사

오늘은 토요일. 

강원도 영월로 나비를 보기 위해 가기로 한 날이다. 하지만 어제부터 내린 비로 모든 일정이 다 취소되어 버렸다. 2주일 넘게 기다려온 일정이 취소되자 허탈한 마음이 밀려왔다. 씁쓸한 마음도 달랠 겸 모처럼만에 아내와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와 쉬다가 문자를 보니 우쓰라님 사진 카페가 새로 열렸다는 소식이 떠 있다. 지난번 인연도 있고 반가운 마음에 가입을 하고 공지사항을 보니 토요일에 창덕궁 출사와 이론 강의가 잡혀 있다. 일요일에 다시 골목길 투어까지. 


갑자기 없던 의욕이 확 생긴다. 마음이 바빠졌다. 사진에 관심이 있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수목원 탐방이 잡혀 있다며 아쉬워한다. 아내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하자 안 갔으면 하는 투다. 이런 반응일 때는 1박 2일은 꿈도 꿀 수 없다. 결국 1박 2일은 말도 못 꺼내고 급히 날짜를 당일로 수정했다. 한편으로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침 10시 모임 시간을 맞추려면 역으로 시간을 계산해야 했다. 다행히 버스터미널에서 안국역까지는 비교적 짧은 거리가 편이니 4시간이면 족할 것이다. 기상 시간을 맞추고 잠을 청했다.


6시 25분 차를 타고 터미널에서 우동 한 그릇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안국역으로 향했다. 빗발이 날리기는 했으나 우려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창덕궁에 도착하니 한 무리의 사람이 보인다.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사람이 많다. 저기구나! 그런데 우쓰라님 같은데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다. 자세히 보니 수염이 없다. 옷 때문인지 좀 젊어진 것 같기도 하고. 



우리는 각자 개인 소개를 하고 창덕궁으로 향했다. 근처에서 온 분도 계시지만 멀리서 온 분도 적지 않다. 다들 기대에 찬 표정이다.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거야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궁궐로 향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절로 설렌다.  예나 지금이나 궁궐은 내게 이질적인 곳이자 현실감이 떨어지는 공간이다. 오늘은 그 낯선 공간에 한걸음 더 다가서는 날이다.  


눈부신 철쭉을 거쳐 궐내각사, 근정전, 그리고 마지막 목적지인 낙선재로 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진 출사가 이렇게 재밌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흥미진진이다. 사람들을 보니 쉽게 말을 걸기가 힘들 정도로 집중한 표정이다. 중간에 우쓰라님이 참여하신 분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일이 생겼다. 평소의 나라면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쓰라님이 직접 찍어주는 사진을 받을 기회가 평생에 몇 번이나 있겠는가. 게다가 다른 이들을 찍어주는 틈에 끼어서 부탁하는 거니 미안함도 덜했다. 평소라면 작가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늘 아쉬웠던 프로필 사진 한 장을 남길 수 있었다. 



우리는 각사를 지나 처마가 주는 아름다운 원경과 근경, 그리고 중첩 등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평소라면 쓱 지나치고도 남을 만한 그런 시간이 찬찬한 설명과 함께 내 카메라에, 때로는 핸드폰 사진으로 남았다. 생각 이상으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다들 아쉽다는 말이 연신 터져 나왔다. 한 군데서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 보면 어느새 다음으로 넘어가야만 했다. 



가끔 우쓰라님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 순간 다른 세상이 거기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쓰라님의 핸드폰에 눈독을 들였을 것이다. 저이의 핸드폰만이 그런 사진을 잡아낼 수 있을 거라며. 그런 우리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했는지 우쓰라님이 개인 핸드폰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받은 폰으로 각자 사진을 찍어 주었다. 이러면 공정하다. 자기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니 변명할 수도 없다. 예로부터 명장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는 말이 틀린 게 없다. 도구를 탓할 게 아니라 나를 꾸짖어야 함을 오늘 똑똑이 배운다.



낙선재로 가야 하는데를 중얼거리면서도 근정전 근처에서 우리는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100m 남짓한 거리의 낙선재로 가기까지 1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에 우리는 인물이 주변과 어우러지는 법, 그리고 여백이 사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비가 준 뜻밖의 선물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중심에는 공간이 있었다. 


마침내 낙선재에 도달했다. 왕의 사랑채이자 서재인 낙선재는 조선왕조 비운의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가 노년을 보낸 곳이다. 스러지는 비운의 왕조를 지켜보면서 옹주는 무슨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까? 평범한 나로서는 급박하게 몰아치던 격변의 시대와 한 사람의 일생에 가해진 무게를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비록 사진을 찍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켠이 무겁게 내려앉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전이 공간을 중심으로 한 설정이었다면 낙선재에서는 프레임과의 싸움이었다. 우리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담고, 사람들은 그 담긴 사진으로 세상을 읽어낸다. 낙선재 안에는 그 자체가 하나의 프레임인 세상이 있었다. 우리는 낙선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 그저 그 프레임을 담으면 될 뿐이었다. 하나의 프레임을 알아갈수록 다음 프레임이 궁금해졌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것도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게 세상 이치이다. 오늘 출사를 통해 또 다른 무기 하나를 얻었다. 


이 대목에서 우쓰라님의 넉넉한 호의가 더해졌다. 덕분에 다들 인생 프로필 한 장을 추가할 수 있었다. 창피함은 순간이지만 사진은 영원하다는 터무니없는 신념으로 다시 사진을 청했다. 새벽 6시도 되기 전에 집을 나왔는데 덤으로 이런 사진까지 건지다니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낙선재를 가슴에 품고 우리는 사진 출사를 마감했다. 사진 기술을 알려주는 사람은 많다. 뛰어난 사진작가도 많다. 하지만 그 사진이 단순하게 사물을 담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과 어우러져 어떻게 다가오는가를 오늘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게 해 준 이를 만난 기억은 없다. 앞으로 살면서 또 수많은 출사를 나가겠지만 이처럼 유쾌한 출사는 없을 거라고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동안 흩날렸던 빗발이 줄어들더니 그의 말처럼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기 시작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날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하마트면 실명할 뻔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