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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May 20. 2023

피에르가 보내온 이화마을 탐사기 2


나는 처음 이화마을에 들어섰을 때, 몽마르뜨 언덕 올라가는 길이 떠올랐다. 이화마을에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파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몽마르뜨는 트램을 타거나 걸어서 갈 수 있다. 몽마르뜨(Montmartre)는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몽마르타리움에서 나온 지명이다. 바로 뒤편에 사크레쾨르(Sacré-Cœur) 대성당이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찾는 파리의 대표적인 명소 중 하나이다. 사람들은 계단에 앉아 공연을 보거나 파리 시내를 구경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파리를 찾는 이라면 한 번쯤 몽마르뜨를 찾아서 사진을 찍는 게 필수코스라 할 정도이다. 이곳이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인정을 받지 못한 화가들이 자신의 꿈을 불태우는 곳이기 때문이다.



피카소, 고흐 등도 이곳에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우면서 그림을 그렸다. 지금도 언젠가 자신의 작품이 인정받기를 바라며 많은 무명이 화가들이 자신의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낭만의 도시라고 파리를 부를 때, 몽마르뜨의 화가들이 그 한 축을 차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내가 보기에 이화마을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우쓰라님 얘기로는 이곳 마을을 상징하는 벽화가 있었는데 워낙 관광객들이 많이 오다 보니 일부 마을 주민이 벽화를 지웠다고 했다. 누군가의 삶의 공간을 딛고서 관광을 한다는 게 쉽지가 않다. 얼마나 관광객이 싫었으면 벽화를 지웠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관광객이야 그냥 스쳐 지나가면 그뿐이지만 주민들에게 이 동네는 삶 자체이자 휴식의 공간이다. 이곳을 찾는 이들이 조심한다고 해도 그게 쉬울 리가 없다.




내가 사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라는 동네는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동네일 것이다. 원래 나는 남프랑스 아를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아빠가 직장을 옮기는 바람에 잠시 그 마을에 살았다. 사람들이 어디 출신이냐고 물어봤을 때 나는 설명을 하기가 싫어 그냥 파리 근교에서 산다고 얘기를 하곤 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우리 동네는 파리 근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를 위해 대신 신청해 준 앙리를 만난 곳도 바로 그 동네였다. 낯설어하는 나에게 앙리는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우리는 같이 파리에 있는 소르본대학에 진학을 했고, 함께 잠시 한국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내 고향은 사실 고흐가 살았던 동네이다. 내가 고흐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정말 고흐가 그 동네에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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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다.


우리 동네 뒤쪽에 있는 공동묘지에는 그와 동생 테오가 함께 누워 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고흐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그가 걸었던 골목, 그가 그림을 그렸던 밀밭, 그가 생의 마지막 끈을 놓아버렸던 라부여인숙까지 이곳 사람들은 다 안다. 지금은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오베르 교회 가는 길>이라는 작품의 배경이 바로 마을에 있다. 물론 사람들이 와서 실제 교회를 보고 실망을 하기는 하지만 이 자그마한 마을에 고흐가 잠들어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동네 사람들은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이화마을이 몽마르뜨와 가장 큰 차이점은 몽마르뜨 앞에는 넓은 광장에 있어서 거기서 공연을 보거나 파리 야경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화마을에서는 그런 공간이 따로 없다. 단지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것만이 허용된다. 대신 야경을 보고 싶다면 근처 카페로 가는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왜 여기에 카페가 이렇게 많나 했으나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이해가 갔다. 서울의 야경을 이곳만큼이나 완벽하게 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보이는 것만으로 이화마을과 몽마르뜨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몽마르뜨는 오랜 시간 동안 축적한 파리의 문화, 예술가들의 공간으로서 상징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몽마르뜨를 자유와 낭만의 상징으로 동일시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어쩌면 이화마을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조금은 다른 느낌이었다. 하나의 공간이 그 독자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이화마을은 예술보다는 삶에 더 치우쳐있다.



이화마을은 조선 시대 쌍계동(雙溪洞)이라 불렸으며,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던 도성 내 5대 명소 중 한 곳으로 꼽혔다고 한다. 이후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도시예술 캠페인을 진행했고 이때 마을 곳곳에 벽화 작업을 진행했다고 전한다.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지로 인정받던 2013년에 꽃과 물고기 계단을 작업하였으나 관광객들의 무분별한 유입과 이로 발생한 여러 불편한 점 때문에 벽화를 덧칠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계단조차 없어지고 새로 만들어졌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사는 공간에 누군가가 무례하게 끼어드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하다. 한정된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소음, 주민 사생활 방해, 쓰레기 무단 투기 등 여러 문제점이 생기는 것도 문제이다. 당연히 거주민들은 관광객들에게 적대감을 보이고, 그들이 자신의 공간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불편함을 토로한다. 예전에 몽마르뜨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카페와 레스토랑 주인들이 영업 방해를 들어 화가들을 내몰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카페와 레스토랑 주인들은 불편함을 어느 정도 감수하기로 했고, 관광객들 역시 마찬가지로 화가를 대우하는 선에서 적당한 타협이 이루어졌다. 지금까지도 몽마르뜨에 화가들이 남아 있게 된 이유이다. 어쩌면 이화마을 주민들도 벽화를 철거하는 선에서 세상과 화해를 했는지 모른다. 어차피 찾는 사람을 막을 수도 없는 법이니 그들로서는 그렇게나마 관광객의 수를 줄이는 데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우쓰라님과 헤어져 마을을 내려오면서 골목길에서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났다. 한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계셨다. 아마 저녁을 준비하러 가는 중이거나 아이들 간식을 사 가지고 가는 모양이었다. 아, 그때 나는 깨달았다. 왜 우쓰라님이 이화마을을 출사 장소로 삼았는지 조금은 이해가 갔다. 그 골목은 누군가가 하루의 지친 몸을 이끌고 가족이 기다리는 공간으로 가는 통로였던 것이다. 골목은 이화마을 전체를 이어주는 핏줄이었던 셈이다.



이화마을은 그 자체가 사진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현장이었다. 오늘 골목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가씨, 어쩌면 골목을 신나서 뛰어다녔을 아이들, 그리고 고단한 골목을 정신없이 내려갔다가 저녁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던 발길들, 술잔을 기울이던 할아버지 몇 분이 거기 있었다. 나는 풍경을 찍으러 간 게 아니라 삶의 이야기를 만나러 갔던 것이다. 골목 가로등에 불빛이 하나둘 켜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던 이유이다.


골목길을 내려오다가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좁은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로등 불빛만이 골목을 고즈넉하게 비추고 있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지만 동네가 아까보다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동네 주민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우울하지도 않았다. 다만 엄마가 끓여주는 따뜻한 수프와 목소리가 듣고 싶을 뿐이었다.



이 골목이 끝나면 나는 다시 큰길과 마주할 것이다. 나는 낙산공원과 이화마을에 머무는 몇 시간 동안 잠시 시간이 정지한 느낌을 받았다. 골목을 나오면서 봉인해 두었던 비밀의 세상에서 빠져나온 듯했다. 아마 이 골목을 벗어나면 도로에는 차가 쏜살같이 달리고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일 것이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늘 그래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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