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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May 20. 2023

피에르의 이화마을 출사기


누군가는 골목을 시간의 통로라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골목을 통해 사방으로 모이고 흩어지고 때로 쌓인다는 의미일 게다. 거기에는 어린아이를 두고 냉정히 돌아서야 했던 어머니의 눈물도, 퇴사를 권유받고 술 한 잔 걸치고 들어가는 아빠의 축 처진 어깨도, 이웃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어머니의 마실길도 다 있다.


오늘은 우쓰라님의 출사팀과 함께 혜화역에서 출발해서 낙성공원과 이화마을을 도는 출사를 다녀왔다. 한국에 온 후 우울하던 차에 우쓰라님의 탐사가 잡혔다는 소식을 친구에게 듣고 친구가 나를 위해 신청해 주었다. 오락가락하는 날씨 때문인지 요즘은 몸이 축 처지고 하루하루가 힘들다. 그래도 봄에 꽃구경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하지만 급격하게 기온이 올라가면서 점점 견디기 어려워졌다.



혜화역 근처에는 마로니에 공원이 있다. 내가 서울에 처음 온 후 자주 가던 게 대학로다. 공연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이곳에서 약속을 잡곤 한다. 우쓰라님과는 이번이 두 번째 출사이다. 지난번 창덕궁 출사 느낌이 좋아서 이번에도 신청했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 들어 카페 회원이 많아지면서 강의 신청이나 출사 신청이 점점 힘들다. 아마 인기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참여 인원의 10% 정도는 외국인에 대한 배려가 있으면 어떨까 싶다. 물론 특별 대우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골목길을 지나 낙산공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랬다. 하지만 조금씩 올라가면서 옆을 보니 서울시가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동안 내가 만난 서울과는 색다른 풍경이었다. 상당히 낯선 풍경에 당혹스럽기도 했으나 나는 어느새 사람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번에도 우쓰라님은 자신이 먼저 구도를 잡아 사진을 찍고 보여주었다.



이전에는 사진 출사를 나간다면 좋은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나처럼 가난한 학생 신분에 비싼 장비를 꿈꾸는 일은 고통에 가깝다. 특히, DSLR은 바디도 그렇지만 렌즈 가격이 만만치 않다. 렌즈 하나를 바꾸기 위해서 얼마나 알바를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니 나로서는 장비 구입에 주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우쓰라님의 출사에서는 오히려 카메라가 홀대를 당한다. 그동안 출사 때 금기처럼 다루어졌던 핸드폰 출사가 당당히 보장되는 것이다. 할렐루야! 우쓰라 만세!(카페 사람들이 이 표현을 여러 번 써서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고 사전을 찾아본 적이 있다. 사전에는 안 나왔다)



사실 한국 속담에 “장인은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프랑스에도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Un tiens vaut mieux que deux tu l'auras(지금의 하나가 나중 둘보다 낫다)”라는 속담이 있다. 첫 출사 때 우쓰라님이 핸드폰을 달라고 해서 인생 프로필 사진을 찍어주는 걸 보고 경악했다. 프랑스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사진이 안 나오면 장비 탓을 한다. 전문가는 장비가 좋으니 대충 찍어도 좋은 사진이 나올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쓰라님은 자신의 폰이 아닌 모델이 된 사람의 폰으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런데 퀄리티가 장난 아니다. 이론은 흉내 낼 수 있어도 오랜 경험이 빚어내는 작품의 완성도는 따라잡을 수 없다.




낙산공원에 가는 길에 우쓰라님이 발을 멈추더니 옥탑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냥 지나쳤더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그런 불빛이었다. 석양이 좀 더 진행되었더라면 더 근사했을 장면이었다. 우쓰라님이 사진 한 장을 찍더니 핸드폰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 순간 해가 건물로 얼핏 가려지며 빛의 경계가 좀 더 선명해졌다. 마치 빛이 건물을 경계로 공간을 나누는 느낌이었다. 같은 공간이었지만 빛에 의해 둘 사이에는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빛이 건물의 경계를 나누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예전에 빛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그때는 빛을 빌려온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건 아마도 자연상태의 빛을 끌어와 사진에 담을 경우 더 풍부한 색감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해 뜰 무렵과 해질 무렵은 사진을 찍는 이들이 탐내는 그런 시간대이다. 그 시간의 하늘을 재현할 수 있는 방법은 세상이 없다. 우리가 지금 찍고 있는 사진도 잠시 그 하늘의 아름다움을 잠시 낚아챌 뿐이다. 그 설렘과 아슬함,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하는 시간을 어찌 사진에 가두어둘 수 있겠는가?




사실 야외 출사에서는 나를 유혹하는 장면이 많다. 어디로 카메라를 들이대야 할지 고민이 들 정도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카메라를 들이대기만 해도 작품이 되는 일도 있다. 그것이 카메라이건 핸드폰이건 세상을 보는 구도가 중요한 이유이다. 우쓰라님도 사진을 정의하면서 첫째, 공간을 지배하라는 말을 하지 않던가. 그만큼 구도는 사진을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번 출사에 앞서 핸드폰 사진 설정을 풀프레임으로 하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낙산공원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신사와 강아지를 만났다. 그들은 마치 허공으로 한 걸음 디디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우리는 카메라 앵글에 피사체와 해를 함께 담기를 원했으나 도무지 각도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길 아래쪽으로 내려가 보았다. 물론 거기서도 해와 두 대상물을 한꺼번에 찍기는 불가능했다. 그나마 아쉬운 대로 허공을 걷는 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다. 모든 걸 다 만족하기에는 어려운 게 너무도 많다. 우리 인생도, 사랑도.


그때 나는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장밋빛 인생 La Vie en Rose>가 들리는 환청을 들었다. 프랑스가 사랑하는 에디트 피아프는 한국인들도 좋아하는 가수이다. 그녀의 <Non, Je Ne Regrette Rien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가 울려 퍼지면 사람들은 가볍게 탄성을 지른다. 오늘은 왠지 그녀의 노래가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Non, Je Ne Regrette Rien

Non, Rien De Rien, Non, Je Ne Regrette Rien

Ni Le Bien Quon Ma Fait, Ni Le Mal

Tout Ca Mest Bien Egal

Non, Rien De Rien, Non, Je Ne Regrette Rien

Cest Paye, Balaye, Oublie, Je Me Fous Du Passe



아니에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아니에요! 그 무엇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내게 줬던 행복이건 불행이건 간에.

그건 모두 나완 상관없어요!

아니에요! 그 무엇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그건 대가를 치렀고, 쓸어 버렸고, 잊혀졌어요.

지난 일들은 이제 신경쓰지 않아요. 





*이 글은 가상인물인 피에르가 한국의 이화마을에 사진 출사를 가는 내용을 다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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