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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Jul 30. 2023

도초도에 가거들랑

비 오는 날 도초도 수국을 보며 걷는다. 

잠시 비가 그쳤다가 다시 쏟아지기를 반복했다. 

십리 길을 늘어선 팽나무도 바람에 흩날렸다. 

수국도 비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도 그랬다.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번에 남아있는 수국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싶었다. 일기 예보에는 계속 비 소식이 있었다. 내가 아침에 나서기를 주저한 이유이기도 했다. 도초도는 배 시간도 신경을 써야 했다. 다행히 도초도는 배가 자주 다니는 편이다. 야간까지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번 주에 도초도의 수국을 자른다는 기사를 보았다. 내가 부랴부랴 비 오는 날 도초도를 찾은 이유이다. 궂은 날씨에 바람까지 부니 여행객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관광객이 거의 없다. 공영버스를 타고 종점에 도착해서 후회했다. 중간에 물어봤어야 했다. 작년 수국 축제 때를 생각하고 그냥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우연히 면사무소 차를 얻어 타고 팽나무 숲 근처에서 내렸다. 



나 혼자 십리 팽나무 숲길을 걷는다. 비 오는 길에 걷는 것도 오랜만이다. 걷다 보니 황진군 소안면에서 이사 온 팽나무, 고흥군 도화면에서 온 팽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나무가 나중에 컸을 때는 이 길이 빽빽해 보이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너무 촘촘하게 심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무 사이의 간격이 좁다.  


날이 좋은 날이라면 하늘을 보며 걷는 재미도 있으련만 비 오는 날은 영 아니다. 그래도 호젓한 숲길을 걷기에는 이런 날이 좋지 않겠나 혼자 위안을 삼아 보기도 한다. 걷다가 드는 생각이 여기 전국 각지에서 온 팽나무들에 자기 이름을 붙인다거나 별명을 지어 보는 일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마 그런 시도가 있다면 이 길을 걷는 이들이 좀 더 재미있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팽나무만 있었더라면 다소 소원했을 텐데 수국이 함께 자리를 잡으니 한결 풍성해 보인다. 조금 더 일찍 왔더라면 수국이 한창이었을 것이다. 수십만 그루 수국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 많지는 않다. 그래도 아직까지 남아 있는 수국이 한 여름이라는 사실을 실감 나게 해 준다. 여름의 여왕이 수국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국은 풍성하고 신선하다. 



길을 걷고 있는 사이에 비바람이 더 거세진다. 어느새 바지 아랫단이 다 젖어버렸다. 그래도 마음을 비워서인지 급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바람은 불고 팽나무는 바람에 흩날리고 내 마음도 덩달아 날아간다. 장마로 전국이 몸살을 앓는 상황에서 이 정도만 해도 감사할 따름이다. 


갑자기 잠자리가 엄청 많이 날기 시작한다. 출발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는데 여기 있지 않은가. 여행은 나서기 전까지는 심란해도 일단 나서면 어떻게든 진행된다. 이렇게라도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도초도 팽나무 숲길과 수국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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