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들 Sep 06. 2023

내몽고 여행기 1

- 내몽고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한여름 은하수를 볼 수 있다는 몽골에 가고 싶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별이 쏟아지는 밤은 상상만으로도 설레게 하는 힘이 있다. 가야겠다고 생각해서인지 은하수가 쏟아지는 사진을 볼 때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은하수를 볼 수만 있다면야 어디라도 좋았다. 아는 이는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은하수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가로등이나 도심처럼 밝은 빛이 없어야 한다. 이런 인공조명은 우리가 별을 보는 데 치명적인 장애물이다. 당연히 빛이 없는 초원지대라면 은하수를 볼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다. 깊은 산속도 별이나 은하수를 보기에는 좋다. 

둘째, 보름달이 뜨는 시기를 피해야 한다. 모르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가면 은하수를 볼 수 있을 거라 착각한다. 하지만 보름달이 밝은 날이면 은하수 보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달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빛덩어리이다. 

셋째,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은 볼 수 없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비가 오는 데 별을 볼 수 있겠는가. 흐리거나 구름이 많은 날도 은하수를 볼 수 없다. 날이 흐리다면 아쉽게도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하필이면 날씨 또한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어디론지 떠나야 했다.  밤하늘을 가득 메운 은하수를 볼 수 있다면야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문제는 항공권 가격이었다. 원래 비싸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미 오를 대로 올라버린 항공권은 아무리 기다려도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스카이스캐너 사이트에 들어가서 검색을 했으나 답이 없었다. 포기해야 하나 하는 순간 우연히 여행사의 내몽고여행을 알게 되었다. 패키지라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일정표에 나와 있는 게르, 은하수, 사막 같은 단어를 보는 순간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성수기임을 감안하면 가격도 생각 이상으로 착했다. 주저 없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잠깐, 왜 하필 내몽고라고 부르는 걸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외몽고도 있다는 말인가. 결론은 물론 그렇다. 한때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졌던 원제국이 붕괴한 후, 몽골제국은 외몽고와 내몽고로 나누어진다. 현재 외몽고는 독립된 몽골 국가이고, 이에 반해 내몽고는 중국에 속한 자치구이다. 즉, 외몽고와 내몽고는 전혀 다른 국가인 셈이다. 이는 몽골을 둘러싸고 국제적인 정세가 작용한 결과이다. 외몽고와 내몽고는 중국과 러시아라는 두 강대국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단 상태로 남는다.      




한 번쯤은 이름을 들었을 만리장성은 흉노/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진시황시절부터 중국의 가장 큰 고민은 만리장성 이북에 위치한 유목민족이었다. 이들이 수시로 침입을 해대는 통에 제국의 국력은 쇠약해졌고 치안은 늘 불안했다. 그럼에도 유목민족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는 못했다. 반전이 일어난 건 13세기 들어 칭기즈칸(Chingiz Khan)의 등장 때문이었다. 칭기즈칸에 의해 아시아와 유럽을 포괄하는 세계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를 건설하면서 대제국을 탄생했다. 칭기즈칸은 ‘세상의 왕’이라는 의미이다. 


                                                          칭기스칸 초상화


     

몽골제국은 기병대를 바탕으로 베이징에서 카스피해, 베트남까지 이전에 누구도 이룩하지 못했던 방대한 땅을 가진 나라였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무기였던 말을 앞세운 속도 앞에 유럽은 삽시간에 유린당했다. 잔인함 또한 당시 유럽인들을 치를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칭기즈칸 사후 손자 쿠빌라이는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원제국을 건설한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것처럼 대제국의 위세는 유럽까지 이어졌다.      

당연히 당시 고려였던 우리나라 역시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막강했던 몽골기병을 앞세운 원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 정벌을 시도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과 1281년(충렬왕 7) 두 차례에 걸쳐 단행된 대규모의 일본 원정은 규모로도 엄청났다. 이때 동원한 배만 해도 4400척에 달했다. 그러나 두 번 모두 태풍에 의해 실패하고 만다. 이에 쿠빌라이는 다시 일본 정벌을 꿈꾸지만 1294년(충렬왕 20) 1월 쿠빌라이의 사망으로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끝이 난다. 흔히 일본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가미카제[神風]의 시작이었다.      

한때 전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제국이었던 원은 쿠빌라이칸이 죽은 후 명의 주원장에 의해 베이징을 내주고 초원으로 쫓겨난다. 명의 대통을 이어받은 청나라는 몽골을 외몽고와 내몽고로 나누어 통치함으로써 제국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고 한 민족으로의 통합을 방해한다. 이 과정에서 한때 대륙을 통치했던 몽골은 소수 변방 부족으로 전락하는 신세에 처한다.      

지리적으로 본다면 고비사막을 경계로 하여 북쪽 외몽고와 남쪽 내몽고가 나뉜다. 청왕조의 붕괴 이후 외몽고는 재빠르게 독립의 길을 걷는다. 1911년 외몽고는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의 도움을 얻어 1924년 몽골인민공화국을 건립한다. 내가 처음 가고자 했던 울란바투루가 있는 몽골이 바로 외몽고이다. 외몽고는 몽골어와 동유럽권에서 주로 쓰는 키릴문자를 사용한다. 당연히 비자 역시 몽골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다행히도 한국인은 무비자로 여행이 가능하다.      

그에 반해 남쪽의 내몽고는 현재까지 중국의 자치구로 남아 있다. 내몽고 역시 일제의 통치를 받는 등 부단한 역사를 보내고 독립을 꾀하지만 실패하고 중국에 흡수 통합의 길을 걷는다. 현재 내몽고는 중국에서 세 번째로 큰 자치구이다. 말은 몽골이지만 몽골 전체 인구의 80%가 한족일 정도로 사실상 중국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자치구로 성도가 후허하오터(呼和浩特)인 내몽고는 몽골어와 중국어를 사용한다. 중국 영토이기 때문에 중국 비자를 받아야 입국이 가능하다. 우리 여행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체 관광에 따른 단체 비자였기 때문에 이동하는 내내 단체 활동을 해야만 했다. 그러면 어떤가. 여행인데~. 

작가의 이전글 도초도에 가거들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