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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Sep 26. 2023

세 명의 인연, 여섯 개의 공간


각기 다른 느낌의 모델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사진 찍는 내내 작은 기쁨이 일렁였다. 오스트리아 출신 케이디는 과감하고 자연스러움을 전면에 내세웠다. 사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한꺼번에 자신을 향할 때 주눅이 들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표정을 지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대단한 미덕이다.




케이디의 또 다른 매력은 외국인 특유의 피부색과 머리칼의 색깔이다. 단정함이 어울리는 한국인과 다르게 야생의 맛이 어느 정도이 느껴지는 케이드의 머리칼이야말로 순광에서 더 빛을 발했다.


다음으로 우리가 만난 이는 미소씨. 오랜 모델 경력에 맞게 포즈를 취하는 데도 여유가 느껴졌다. 공간에 대한 이해도 풍부해서 자신이 어디로 서야 할지, 어디쯤이 적당한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덕분에 같은 공간에서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진 사진을 건 수가 있었다.




마지막은 한복을 준비해 온 단미씨. 이 가을에 이렇게 한복이 어울릴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본인 스스로 한복을 디자인할 정도로 감각이 뛰어난 단미씨는 한복의 선과 공간의 여백을 충분히 구현해 냈다.



그녀가 올리는 손끝에서 햇살이 반짝였다가 부서졌다. 부드러운 햇살은 얼굴을 쓰다듬고 아래로 흘렀다. 다양한 포즈를 위해 자세를 잡은 것이겠으나 매 순간마다 다양한 레퍼토리처럼 그녀가 부르는 수많은 노래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나는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듣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출사에서 제일 아쉬웠던 점은 중간에 렌즈를 바꿔야만 했다는 점이다. 지속적으로 렌즈를 촬영한 것이 아니라 일부 찍다가 렌즈를 다음 사람에게 건네야만 했다. 사진을 찍는 데도 흐름이 중요한데 중간에 렌즈를 교체하다 보니 흐름이 자꾸만 끊어졌다. 아마도 주최 측에서도 참석자 숫자만큼 렌즈를 다 준비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 아쉬움은 가져간 다른 카메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1차 스냅사진이 끝난 후 우리는 장소를 옮겨 3명의 사진을 다시 찍었다. 공간이 달라진 만큼 분위기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케이디는 좀 더 과감해지고 도발적인 차림이었다. 첫 번째 장면이 이국적인 미를 동반한 자연스러움이었다면 두 번째는 섹시한 건강함이었다. 담쟁이덩굴에서 그녀의 환한 미소는 더 돋보였다.




한국의 자연과 이국적인 아름다움이 결합하니 또 다른 느낌을 준다. 우쓰라님의 진행에 따라 안쪽 포인트로 그녀가 걸어 들어가자 이번에는 숲에 들어온 느낌이 물씬 풍긴다. 풍성한 담쟁이를 배경으로 같은 듯 다른 느낌으로 변신한 그녀가 한 장의 가을 포스터 같다.


두 번째 장면에서 미소님은 좀 더 발랄해졌다. 밝고 화사한 옷차림이 세련된 젊은 감성을 대변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찍어오는 카메라를 외면하지 않고 참석자들과 눈길을 마주쳐주고 끝까지 응원을 보내주는 게 인상 깊다. 요즘처럼 사진 찍기 좋은 계절에는 모델들에게도 문의가 많이 들어올 것이다. 짧은 시간에 카메라 셔터의 세례를 견뎌야 하는 극한 직업일 텐데 의연하게 해낸다.



오늘 3명의 모델이 다 뛰어났지만 내가 생각하는 압권은 자작나무 숲에서 만난 단미씨이다. 그 짧은 시간에 나는 가을의 비밀을 다 읽어버렸다. 가을 햇살이 왜 아름다운지, 왜 순광과 역광을 구분해서 찍어야 하는지, 빛이 한 사람을 얼마나 황홀하게 만드는지, 나무가 들려주는 노래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어렴풋하게 알 듯싶었다. 미처 다 주워 담을 수 없는 수많은 말들이 그 짧은 시간에 쏟아졌다.



내 손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조금은 달랐다. 대상을 찍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특별한 사진을 얻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아니다.


오늘 출사에서 가장 압도적인 차이를 느꼈던 건 렌즈이다. 나는 75mm에 익숙지 않다. DSLR에서와 미러리스의 차이도 상당하다. 미러리스 75mm라면 DSLR로 따지자면 100mm 정도의 수치를 의미할 것이다. 나는 출사 내내 모델과 나와의 거리 때문에 초점을 맞추느라 진땀을 뺐다. 렌즈를 다른 이에게 주느라 빈 시간 동안 사전에 준비한 다른 카메라로도 촬영했다. 나중에 비교해보니 빌토록스 렌즈가 구현한 사진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만약 75mm 렌즈로만 찍었더라면 비교가 어려웠을 것이다. 내게는 첫 출사이니 만큼 이번 출사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인상 깊은 첫 출사를 빌트록스 렌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더욱 기뻤다.


9월은 바람도 향기로운 계절이다. 선유도 공원의 출사가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을 이번 출사를 진두지휘해 준 우쓰라님과 스테프, 자신의 매력을 마음껏 뽐내준 모델들, 그리고 내가 오늘 처음 접했던 75mm 렌즈 덕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감이 나지는 않지만 이 정도 퀄리티의 사진은 온전히 렌즈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또 이 렌즈를 만날 수 있을까 싶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만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이 렌즈와 더불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많이 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사진들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아직은 살만하다,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것을 보고 싶다.


나는 앞으로 사진으로 더 많은 세상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 단순히 대상과 피사체로서만이 아니라 그들과 따뜻한 눈을 마주치고, 그들이 하지 않은 이야기를 읽어내며, 그들이 침묵으로 그려내는 수많은 장엄한 서사시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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