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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Apr 14. 2024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시간이 갈수록 기술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과연 하루라도 핸드폰을 잊고 살아본 기억이 있는가? 최근 들어 인터넷 검색이나 유튜브를 하지 않고 살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그건 해외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보면 나는 삶의 상당 부분을 이들 전자기기에 의존하며 살고 있다. 만약 이들이 내 삶에서 사라진다면 과연 그 공백을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렵다. 

나는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무언가 더 소중한 것들이 우리 곁을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나날이 더 편리해지고 좋아지는 느낌이 들지만 그 무게만큼 더 허전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외양은 점점 더 화려하고 현란하게 우리 눈을 사로잡지만 막상 사라지고 난 다음에 더 공허함이 밀려드는 게 실감 난다. 



이에 비해 소로의 <월든>에 등장하는 잔잔한 이야기들은 상상만으로도 너무 아득해서 쉽게 와닿지 않는다. 그는 <월든>에서 자신이 손수 오두막을 지었던 그곳에서 만난 자연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당연히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문명이나 첨단기술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흙냄새 가득한 식물이나 동물 이야기, 숲과 대지가 수시로 등장한다. 소로우가 한국에 소개된 이후 수많은 독자들이 그 낭만적이고 소박한 삶에 열광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내 주변에도 이런 삶을 사는 이가 있기는 하다. 올해 11년째 서울생활과 시골생활을 병행하는 그이가 올린 페이스북 내용을 보면 소로우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밤중 풀벌레가 우는 소리, 우체통에 집을 짓는 딱새 이야기부터 시시각각으로 주변이 눈부시게 변하는 시골의 봄날 이야기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물론 매번 낭만적인 이야기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골생활이라면 부러울 법한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아내가 한때 도시 인근에 작업실을 만들 생각이 있는가를 물었다. 나는 공간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거절했지만 내심 그런 공간이 탐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거절한 데는 외지에 그런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 부지런하지 않으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아는 이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적지 않다. 도심에서의 각박한 삶을 살다가 자신만의 텃밭이나 집필실에서 땀을 흘리면 힐링이 된다고 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공간을 그리워하며 사는지 모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아파트가 아니다. 어차피 저녁 잠자리에 누울 때는 불과 한평 남짓한 자리면 족하지 않던가. 집이 아무리 넓어도 잠자리에 들 때는 불과 한두 평이면 충분하다. 죽을 때는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도 우리 욕심은 끝이 없다. 

우리 모두 소로처럼 살 수는 없다. 어차피 그런 삶이 허용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로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매캐한 흙냄새 풍기는 거기로 가보고 싶다. 가서 한 달 만이라도, 아니 단 며칠만이라도 살다 오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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