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에 내려서자 바람은 서늘하고 풀벌레가 운다.
한여름의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있음을 풀벌레 소리에서 느낀다. 바람이 일 때마다 살포시 풀잎들이 흔들리는 걸 보니 저절로 마음이 가벼워진다. 내가 만경강을 찾은 이유는 <소리로 보는 만경강>이라는 완주에서 하는 지역 특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이번 행사는 빈집 재생사업을 거쳐 지역의 문화공간으로 거듭난 ‘하리공간 완주온날’에서 이루어졌다.
완주에 사는 이들에게 만경강은 어머니의 젖줄과 같은 강이다. 완주군 동상에서 발원한 물은 만경강으로 흘러간다. 평소 눈으로만 보던 만경강을 사운드 스케이프라는 시선으로 접근하려는 발상도 신선하다. 시각이 청각으로, 눈에 의존하던 감각이 귀로 전환함으로써 일상의 치유와 힐링을 맛보게 하자는 게 프로젝트의 기획의도이다.
흔히 사운드 스케이프는 소리를 들으며 풍경을 느껴 보게 하는 프로그램으로 알려져 있다. 참가자들은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소리의 근원을 추적하고 관찰하며 때로 상상에 빠진다. 이 과정에서 자연과 친해지며 닫혀 있던 마음의 벽이 허물어진다. 이미 서울이나 제주 등지에서는 사운드 스케이프와 관련하여 체험 프로그램을 추진 중인 업체가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완주 군민에게는 생소한 프로그램이다.
전문가의 간단한 기기 작동에 관한 설명과 함께 강변을 걷는 것으로 프로그램은 시작되었다. 기기를 켜자 소리를 증폭시키는 마이크 덕분에 주변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한 걸음 뗄 때마다 발걸음과 바람 소리, 그리고 어디쯤엔가 숨어 있을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귀가 새로 열리는 느낌이었다.
아마 헤드폰이 없었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경강으로 걸음을 뗄 때마다 어둠의 문을 지나온 소리들이 내게 파도처럼 밀려왔다. 애써 귀를 기울였건만 그 소리들을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기는 눈으로 본다 해도 그 낱낱을 헤아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어스름을 넘어 본격적인 밤이 되자 사방에서 어둠이 밀려왔다. 자연스럽게 신경은 귀로 쏠렸다. 시선이 빛을 잃어버리자 귀가 더 밝아진 때문이다. 눈으로 볼 때는 들리지 않던 것들이 한 걸음 더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살면서 한 편에 밀어두었던 소리들이다. 왕귀뚜라미 우는 소리, 새 짖는 소리, 멀리서 강이 낮은 목소리를 하며 흘러간다. 덩달아 바람소리도 더 가깝고 살갑게 느껴진다.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얼마나 많은 소리들을 잊고 살았던가? 이른 새벽에는 아침을 여는 소리가 있고 밤에는 어둠을 당기는 소리가 있다.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은 만경강이 들려주는 자연의 소리를 마음껏 챙기며 걸었다. 덕분에 짧은 시간이지만 모처럼만에 힐링의 순간을 누릴 수 있었다.
풀벌레 소리를 가슴에 담으려면 바쁜 걸음은 잊어야 한다. 최대한 느리고 음전하게 걸어야 비로소 소리들이 내게 마음을 열어준다. 만경강에서 머무른 시간은 30여 분 남짓이었지만 내게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쩌면 한여름에만 들을 수 있는 그 소리를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맨얼굴의 만경강을 마주하면서 여름밤의 호젓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제 만경강에도 곧 서늘한 바람이 불 것이다. 나뭇잎들은 녹색의 옷을 벗고 붉은 옷으로 갈아입고, 무성했던 매미울음도 자취를 감추리라. 그 빈자리를 세상의 가장 깊은 고요와 무거운 침묵이 채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무엇이 문제인가.
저기 만경강이 있는데, 저만치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