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다니다 보면 기대치 않았던 일이 생기기도 하고, 뜻밖에 우연히 만난 인연이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한다. 나에게는 베니스가 그랬다. 우연히 갔던 부라노섬도 인상적이었지만 베니스 숙소에서 만난 유쾌하고 친절한 매니저 emanuele과의 만남이 그렇다.
피렌체 더몰을 떠나 3시간 남짓 가다가 볼로냐를 지나자 드디어 고대하던 베네치아 표지판이 보인다. 영어 베니스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베네치아는 물의 도시로 유명하다. 물의 도시라는 이름답게 수백 개의 다리와 바포레토가 베니스 시내 곳곳을 누비면서 사람들을 연결해준다. 베니스에서는 군데군데 보이는 곤돌라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인생이 즐거워지는 베니스에 서면 저절로 노래가 흘러나온다. 곤돌라는 물살 따라 흐르고 당신은 어느새 유럽의 심장부에 있다.
사실 베니스는 도착부터 우리를 힘들게 만들었다. 베니스 이정표를 보고 드디어 베니스에 진입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여경의 수신호에 따라 코너를 돌자 숙소로 진입하는 길이 없다. 그리고 왔던 길을 가야 하는 상황이 생겨버렸다. 그때의 당황스러움이란. 운전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같은 길을 다시 가야 한다는, 그것도 같은 길을 운전해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이 주는 무력감을, 중간에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꼬박 30분을 그렇게 돌아와야만 했다. 그래도 두 번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은 것에 감사할 수밖에.
처음에는 베니스의 특수성은 생각하지도 않고 중간에 빠져나갈 길이 없는 외길을 10분 넘게 가야만 한다는 사실에 버럭 짜증이 났다. 하필 그 순간에 걸린 데 아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죄 없는 아들에게 큰 소리를 냈다. 그러다 보니 예정과 다르게 다시 도시로 진입하는 시간이 30분이나 늦어졌다. 이번에는 차를 근처에 세워두고 실수했던 근처까지 일부러 가보았다. 교통정리를 하는 여경에게 물어도 차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결국 섬으로 차가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외부에 차를 주차하고 짐을 싣고 가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 실수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글에서 베니스 본섬으로 차가 들어갈 수 없다는 글은 읽었지만 내비게이션만 의존하다 보니 잠깐 착각을 했던 것이다.
일단 아이들과 짐을 길에 내려놓고 근처의 유료 주차장을 찾아갔다. 하루에 32유로. 이틀이면 64유로다. 그동안 경험했던 유료 주차장 중 제일 비쌌지만 다른 선택은 없었다. 우리는 베니스에 이틀을 묵어야 한다. 실제 있는 시간은 48시간이 안 되겠지만 그건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그들에게는 이틀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이 중요할 뿐이었다. 나중에 차를 찾을 때, 요금은 지불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내 차는 잠시 이틀간의 휴식을 부여받았다. 이틀 주차요금이 하루 숙박치에 맞먹을 정도로 비용 지출이 크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주차 빌딩에 주차하고 아이들과 짐을 하나씩 나눠 들고 출발했다.
처음에는 짐을 끌고 숙소까지 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차가 들어갈 수 없다는데 다른 방법이 없다. 베니스에서는 베니스의 법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첫 번째 다리를 넘어가는 순간이 가장 큰 고비였다. 정말이지 다리를 몇 번이나 건너야 했다면 나는 베니스를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길은 짐을 끌고 다닐만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묵을 숙소를 도저히 찾을 방법이 없었다는 점이다.
고비였던 첫 번째 다리를 건너자 베니스의 활달하고 정겨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나저나 구경보다 숙소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사람들에게 주소를 보여주자 문 위에 있는 숫자를 확인하라고 한다. 수로를 따라 한참을 가자 정작 필요한 539번은 없고 건너뛰고 550번대가 나온다. 이건 대체 또 어찌된 일인가? 모를 때는 물어봐야 한다. 눈치 볼 필요도 없고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절하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 그렇다. 베니스에서는 다들 그렇게 집을 찾는다.
뱃사공이 노를 저으면
세상 건너편까지 당신의 이야기가 전할 게다
어두워지는 황혼의 베니스는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무거운 짐을 들고 헤매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유쾌하고 즐거워 보였지만 우리는 머물 곳을 찾지 못해 길을 헤매는 허기진 여행객에 불과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더 늦기 전에 숙소에 도착해야만 했다. 결국 아내와 딸을 남겨두고 나와 아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숙소를 찾아 길을 나섰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베니스의 그 복잡한 골목을 헤치고 숙소를 찾아간 것은 기적 같았다.
드디어 539번지.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간신히 숙소에 도착하니 문이 잠겨 있다. 문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하니 잠시 기다리라 한다. 이후 키가 훌쩍 큰 사내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emanuele이었다. 사무실에서 체크인을 위해 절차를 밟는 사이, 예상하지도 않았던 벌금 이야기가 나온다. 7시 이후에 도착했기 때문에 추가 요금 30유로가 붙는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사실 도착이 이렇게까지 늦을 이유는 없었는데 피렌체 더몰에서 지나치게 시간을 소비한 나머지 베네치아 도착시간이 늦어졌던 것이다. 예상으로는 1시쯤 출발하자 했다. 출발 시간이 3시쯤이었으나 베니스에 도착해서 길에서 헤매고 주차빌딩에 차를 주차하느라 또 시간이 걸리느라 예상보다 한참을 늦었다. 하지만 이 친구에게 그런 장황한 설명은 효과가 없다.
그는 갑자기 서비스 요금을 내야 하는 내 상황에 못내 미안해했으며 친절하게 숙소 구석구석을 안내해주었다. 숙소를 보는 순간 베니스에 도착해서 30분을 넘게 헤맨 일이며 캐리어를 끌고 몇 번이나 다리를 건너며 헐떡대던 고통이 사라졌다. 대신 늦은 체크인 덕분에 나온 서비스 요금 30유로에서 5유로를 깎아 주는 것으로 미안함을 대신했다. 서둘러야 한다. 내게는 서둘러 가야 하는 이유인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 후에 아내 이야기로는 내가 그를 만나고 난 이후, 그가 우리 남은 가족을 데리러 도로까지 왔었다는 말을 들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도 손님을 위해서 말이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은 그가 알려준 길이 효과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알려준 길은 남겨진 가족을 어떻게 데리러 갈까 하는 내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해주었다. 알려준 대로 가자 복잡했던 골목에서 헤매는 대신 마술처럼 순식간에 가족들에게 갈 수 있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하니 처음에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던 베니스의 골목을 숙소 중심으로 순식간에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베니스는 낯설지만 특별하게 내게 다가왔다.
밖에서 매니저를 기다리느라 모기에 몇 방 물리기는 했지만 쉴 수 있는 숙소가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고생 끝에 숙소에 도착한 아내는 매니저 이야기를 하면서도 숙소 시설에 대해 대단히 만족해했다. 방은 침실과 거실이 따로 구분되어 있어서 널찍했다. 특히, 요리를 할 수 있는 주방이 있다는 사실과 쾌적한 시설에 대해 몇 번이나 칭찬을 했다. 게다가 세탁기를 이용할 수 있어서 그동안 묵은 빨래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도 이번 숙소의 큰 장점이 아닐 수 없었다.
리얄토 다리를 건너는 순간
당신도 베네치아인이다.
그들이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다음 날, 우리는 아침을 먹고 리얄토 다리(RialtoBridge)로 향했다. 베니스 사람들은 16세기가 될 때까지 제대로 된 다리 없이 나무다리를 임시로 사용하다가, 16세기 말 안토니오 다 폰테가 돌로 된 최초의 다리를 설계·건축하였는데 그 다리가 바로 리알토 다리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다리는 1854년 아카데미아 다리가 지어지기 전까지 대운하를 건너는 유일한 다리였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베니스 하면 리알토 다리를 떠올리고, 순례하듯이 이곳을 잊지 않고 방문한다.
베니스를 찾는 이라면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찾고자 한다면 당황하지 말고 우선 건물 벽을 보아야 한다. 그게 리얄토 다리건 아니면 산마르코 광장이건. 그러면 어김없이 목적지와 화살표가 보일 것이다. 내가 그 복잡한 베니스에서 길을 잃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방에는 없던 화살표 때문이다.
처음 목적지였던 리알토 다리는 역시나 그 유명세만큼이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처음 목조다리였던 리알토 다리는 귀금속과 가죽 공방들이 빼곡하다. 피렌체에서도 그렇지만 다리를 하나의 상권으로 개발하는 기발한 생각을 하다니 수완이 좋기는 하다. 사실 쇼핑을 하기 위해서는 리알토 다리처럼 유명한 곳보다는 작은 골목을 순례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골목골목의 숨겨진 볼거리를 구경하면서 다니는 건 여행지의 또 다른 재미이다. 뜻하지 않은 쇼핑도 거부할 필요는 없다. 쇼핑하는 순간 우리는 그 도시의 매력에 사로잡혀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거창하거나 값 비싼 물건이 아니어도 말이다.
리알토 다리를 거쳐 만난 성당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아내와 딸이 안 보인다. 간다면 간다고 했을 텐데 도무지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그렇게 핸드폰도 없는 상태에서 두 사람과 헤어지고 나니 막막하기만 했다. 아침부터 자유시간을 얻고 싶다던 투덜대던 아들은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는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점심값도 안 가지고 갔는데 살짝 걱정이 든다. 게다가 숙소 키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숙소로 돌아간다고 해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길은 광장으로 통한다니 가다 보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산마르코 광장으로 향했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산마르코 광장은 비둘기가 끝이다. 예전 기억처럼 광장에는 여전히 비둘기가 많았다. 처음 베니스를 찾은 건 대학시절이니 참 오래전 일이다. 베니스를 떠올릴 때마다 유리 세공품을 보며 다녔던 기억과 산마르코 광장, 그리고 바포레토를 탔던 것 외에 특별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나폴레옹이 산마르코 광장을 유럽의 응접실이라고 했다지만 나는 여전히 그 말이 와 닿지 않는다.
구경을 하는 것도 좋지만 가족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내가 왔던 쪽에서 광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계속 보고는 있었지만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어떻게 찾는다는 말인가. 핸드폰을 파리에서 잃어버려서 전화도 없는 상태에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뒤를 돌아본 순간, 이게 웬일인가. 낯선 두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다. 딸 아이는 나를 바로 알아보았지만 아내는 인파 때문인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산마르코 성당 근처에 미슐랭 맛집이 있어서 무작정 찾아갔다. 식당 점심시간은 3시까지,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2시 40분경. 그런데도 웨이터는 특유의 미소를 잃지 않았다. 늦은 점심이라 그런지 손님이 제법 있었다. 우리는 파스타와 다른 음식을 시켰다. 그때 마침 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반가운 마음에 길을 나섰다. 하지만 지금 있는 곳에서 아들을 데리러 가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식사를 하고 만나자는 제의를 했다. 그 순간 아들의 오해가 시작되었다. 결국 아들을 못 만난 채로 식당에서 음식을 먹다 보니 내내 불편했다. 아들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혼자 숙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숙소에 도착했을 무렵,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쓰러져 계신다. 피를 흘리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나는 우선 큰 소리로 주위의 도움을 요청했다. 주민 몇 분이 헐레벌떡 뛰어내려왔다. 그중 한 명은 팬티 바람이었다. 그나저나 이곳에는 차가 없는데 어찌 오나,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다. 사람들도 안절부절이었다. 기다리는 도중에 주민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면서 나에게 고맙다고 연신 이야기를 한다.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마침내 10분 정도 지났을까, 구조대원들이 도착했다. 구급 의자에 앉은 할아버지는 고맙다며 내게 차오, 하고 인사를 건넨다. 나도 그제야 안심을 하고 숙소로 발길을 옮길 수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피곤함이 급하게 밀려왔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었고 다친 노인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써서인가 보다. 아들도 피곤했는지 자고 있다. 얼마 후에 아내와 딸아이도 합류했다. 우여곡절이 많은 하루였지만 그렇게 베니스의 하루는 가고 있었다. 우리는 광장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모처럼만에 광장에서 사람들에 섞여 식사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간다. 베니스의 명물인 곤돌라를 타지도, 하다 못해 바포레토도 타지 못했는데 베니스의 마지막 밤이 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쉬움이 남는지 미리 보아두었던 다리 옆 아이스크림 집으로 향했다. 엉겁결에 나도 따라나섰다. 아들이 한턱낸다고 해서 갔지만 가격이 5유로. 그렇다고 특별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아이스크림에 초코 시럽을 바른 후 그 위에 토핑을 얹는 수준이었다. 그러면 어쩌랴. 여기는 베니스고, 아이들로서는 베니스의 마지막 밤이 아쉬울 수밖에.
잠시 시간이 멈추어도 좋다. 베니스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