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냥크, 시간은 어디로 흐르는가?
세냥크 수도원으로 가는 길은 험하다. 유일하게 세냥크로 이어지는 길은 그리 넓지 않은 외길이어서 마주 오는 차라도 만나면 후진을 해야 한다. 세냥크로 가는 길은 문명세계에서 고독의 영역으로 가기 위한 길이라서 그런지 길은 외로워 보인다. 이곳 세냥크에 머무는 수도사들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 이 먼 길을 걸어오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영혼과 생을 신에게 바친 수도자들이 세속을 잊고 자신과 만나기 위해 향하는 곳이 수도원이다. 수도원에서는 엄격한 규율과 질서를 요구받는다. 수도원에 들어오면서 침묵의 서원을 하는 곳도 있을 정도이다. 수도사들은 그곳에서 신이 주신 임무와 신의 영광을 흠모하며 기도와 정진으로 일상을 보낸다.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유한한 시간을 신에게 헌신하면서 신의 사제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 외진 곳에 세냥크 수도원을 세운 이유가 있다. 수도자에게 세속의 번민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욕망은 치명적이다. 세상의 편안과 나태, 그리고 부와 권력의 유혹은 독한 것이라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영 세속과의 인연을 끊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 외진 곳에 터를 잡고 수도원이 생겼고, 신자나 여행자들은 평안과 평화로움의 부스러기나마 맛보기 위해 여기를 찾는다.
세냥크 수도원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고요가 수도원에 가득 깃들어 있는 느낌이다. 조금 전까지도 바쁜 일이며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던 것도 여기서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바람이 수도사들의 말을 전하는 것 같다. 그동안 잘해왔다고, 그러니 지금은 조금은 쉬어도 된다고. 내 지치고 허전한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같다.
바람아
우리는 다시 만나지 말자
세상 끝 여기서만큼은
내 안을 거스르던 바람도 좀 쉴 테니
보랏빛 향기만 남아서
다음을 기다리자
욕망이야 다음 세상일로
잠시 미뤄두자
되는 일이란 없으므로
그래서 안 되는 일이란 없으므로
- <세냥크 수도원에서 온 편지>
수도원에서 관리하는 라벤더 밭에 바람이 일면 그 평정함은 세상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그 바람은 세상을 거쳐가는 바람과 다르다. 이곳을 찾는 이라면 누구라도 비슷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라벤더를 보고 있으면 평온함과 느긋함, 여유로움. 이런 단어들이 마구 떠오른다. 보랏빛 라벤더가 출렁이면 마음 한구석이 울컥해진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걸 보고 있노라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라벤더 밭을 따라 걷는 바람은 아마도 천국에서 불어오는 바람일 것이다.
산속에 피어난 꽃, 생트마리
무스띠에르 생트마리(moustiers-sainte-marie)는 고르주 뒤 베르동(GorgesduVerdon) 협곡 서쪽에 위치한다. 여행을 시작한 이후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 나올 때면 긴장과 함께 묘한 설렘이 느껴진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익숙한 세계에 살아왔다. 한동안 패키지도 그렇고 자유여행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다녀온 곳을 가야만 안심이 되곤 했다.
여기를 택한 이유는 다녀온 사람들의 평이 하도 좋아서 언젠가 한 번은 가봐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단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나면 대부분의 여행은 순조롭다. 유독 도시에 약한 모습을 보여 왔던 나로서는 이처럼 느긋하게 산길을 가거나 농촌 풍경을 보면서 가는 게 좋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큰 도시에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긴장이 된다. 거기다 여러 갈래길이 나오면 그 순간은 혼돈의 카오스이자 공포로 바뀐다.
주차장을 지나 가파른 경사길을 5분 남짓이나 갔을까 마을이 나온다. 산중턱에 이런 보석 같은 마을이 있다니.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지만 저절로 탄성이 나올 만하다. 마치 산속 깊이 숨겨진 비밀의 마을로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다 보면 하늘에서 이 마을로 내려 왔다는 노란 별이 두 봉우리 사이에 걸쳐져 있다. 두 절벽 사이에 225미터 줄에 드리워진 별이 유명한 동네이기도 하다. 역시 성모 마리아의 수도원이라더니 그럴 만한 스토리가 숨겨져 있는 동네이다.
골목길에 들어서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산속에 이런 마을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아래 세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마을 풍경이 펼쳐졌기에 잠시 얼떨떨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고지여서 그런지 아니면 흘러내리는 계곡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전까지 나를 괴롭혔던 극심한 더위가 한방에 가시는 느낌이었다.
특히 이 마을의 명소라 할 수 있는 빙하가 녹으면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 밑바닥까지 저릿저릿 시원해진다. 정말 자연의 위대한 힘은 인간의 상상 이상, 아니 도저히 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처음 이 마을을 만든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지 않았을까. 생각 같아서는 이런 곳에서 하루 묵고 가고 싶지만 글쎄다. 우선 머릿속으로는 하루 숙박비가 얼마나 나올까 계산부터 한다. 어쩔 수 없이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야 하는 가난한 여행자의 한계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 마을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불가사의할 뿐이다. 마을을 돌다 보니 절벽 위로 올려다보니 산 위쪽에 작은 성당이 보인다. 이 높은 산 위에 성당을 만들다니, 아마도 신앙심이 그걸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까지 산길이 이어져 있겠지만 우리는 갈 수가 없다. 정말 여행은 저런 곳을 가야하는데 하는 생각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은 갈 수가 없다. 체력도 시간도 우리에게는 없다.
저 예배당을 건설하기 위해 많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저곳에도 기도를 통해 신에게 다가서는 수도자가 있었을 것이고, 그를 위해 많은 이들이 헌실을 택했을 것이다. 인간은 시련과 고통을 견디면서 신에게 가까이 가는 방법을 찾고자 고심해왔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힘든 여정을 견디면서 신이 주신 기쁨을 찬미하며 은혜를 맛보고자 했다. 아마 이 예배당을 건설하는 이들의 심정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그다지 큰 마을은 아니어서 작은 골목을 따라 돌다 보면 별게 없는 데도 이상하게 자꾸만 마음이 끌린다. 마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근사한 시계탑 옆에는 여행 안내소가 있다. 그 길을 따라 가면 연이어 가게들과 식당이 나온다. 워낙 작은 마을이다 보니 불과 10여 분 남짓이면 전체 마을을 다 돌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작은 마을은 한 바퀴 도는 것도 금방이다. 나는 여기에 머무르는 대신 마을 풍경을 담은 엽서 몇 장을 사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평화로운 마을을 배경으로 한 야경사진이다. 라벤더의 고장이라 그런지 풍경도 근사하다.
이 무더운 여름, 이런 멋진 곳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마을 다리에 서서 계곡 아래로 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 물은 이 마을이 생기기 전에도 흘렀을 텐데. 계곡물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물은 졸졸 흘러가는 시냇물 차원이 아니라 물살의 흐름을 느낄 정도로 제법 빠르고 양도 많다. 손을 잠시 대보니 빙하가 녹아 흐르는 물이라서 그런지 시원하기가 이를 데 없다. 아마도 패키지여행이라면 쉽게 오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위안 삼기로 했다.
계곡 옆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것도 참아 본다. 대신 배고픔을 시원한 아이스크림으로 대신해 본다. 마땅한 식당을 찾다가 고른 게 하필 샌드위치집이다. 딸아이와 같이 기다리다가 사람이 많기에 먼저 내려왔다. 아이가 한참을 기다리다가 주문을 받아온 샌드위치는 만져보니 방금 만들어서 그런지 따뜻함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중 유독 아들 샌드위치에 가족들의 눈길이 자주 간다. 매콤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샌드위치에 호불호가 있을 리 없다.
나는 이곳을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몇 군데 안 되는 곳으로 꼽을 수 있을까? 나중에라도 다시금 찾고 싶은, 추억 속의 그곳으로 떠올릴까? 솔직히 확답은 못 하겠다. 하지만 액상 프로방스 지역을 찾은 이라면 한번쯤은 찾기를 권하고픈 매력이 있는 곳임에는 틀림없다. 더 여유가 있으면 하루쯤 머물러도 좋고, 더 마음이 가면 며칠 묵어도 좋으리라.
추억이 가족을 만드는 생크로와
잠시 쉰 후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생크로와 호수로 방향을 정했다. 아무리해도 이 놈의 호수는 이름이 외워지지 않는다. 경사진 산길을 지나 다시 야트막한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다 보니 드디어 호수다. 아니, 저건 호수라기보다는 강이나 바다라 해도 믿어질 정도로 크다. 해수욕장이라도 온듯이 사람들은 수영복차림이고 군데군데 요트도 보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는 차량의 뒤를 따라 조심스레 내려가 본다.
내려가는 길이 좁고 위태로워 보인다. 갈까 말까 하다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일단 가보기로 한다. 아니나 다를까, 아래로 내려가 보니 차를 주차할 곳이 없다. 느긋한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니 신나는 모습이기는 한데 도무지 차를 놓을 곳이 없으니 방법이 없다. 차를 가지고 다니는 즐거움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주차는 늘 고통스럽다. 그것이 유료건 무료건.
결국 호수는 차를 잠시 세우고 보는 걸로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다. 가족들 역시 동의하는 걸로 가볍게 문제를 해결했다. 푸른 호수와 즐거운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에 평화가 밀려온다. 오늘은 이렇게 멋진 풍경을 가슴에 담아두었지만 정작 하루 저녁 머무를 데가 고민이다. 스스로 고행의 길을 택한 여행자의 운명은 다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