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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과 연애 중이다

by 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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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을 글과 함께 보냈다. 어린 날 공책 한 귀퉁이에 적어 둔 짧은 문장에서 시작해 원고지를 거쳐 요즘은 컴퓨지와 만난다. 어떤 때는 찰나의 순간에서 떠오르는 구절이 오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가장 곤혹스러울 때는 차를 운전할 때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일이다. 생각이 달아나기 전에 잡아야 하는 데 조바심이 나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나는 신호등에 걸린 시간에 녹음기를 켜든다. 이 방법을 안 이후 글쓰기가 더 확장된 느낌이 든다. 예전에는 녹음해서 책을 쓴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한다.


어떤 이는 글을 오래 묵혀두기도 하지만 나는 다작에 해당한다. 올해만 해도 신문사에 20여 편의 글을 연재했다. 완주의 재발견 시리즈와 생태 환경 칼럼이다. 매주 원고를 보내야 하는 입장에서는 부담이 크다. 10편은 대략 4,000자 내외였기 때문에 글을 쓰다 보면 새벽까지 쓸 때가 많았다. 가장 많은 분량은 8,000자를 훌쩍 넘겼다. 청각 장애를 앓으면서 도자기를 빚는 도공분이셨는데 인터뷰 이후 감정에 빠져 쓰다 보니 분량이 엄청나서 놀란 적이 있다.


일반 글도 그렇지만 신문사 청탁 글은 부담스럽다. 활자화된 글이 주는 무게와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읽는 이들이 해주는 말이나 당사자들이 보여준 반응은 내가 글을 쓰게 하는 힘이자 동력이었다. 대개 조간신문은 인터넷판이 저녁에 발행된다. 글이 발행되고 나면 내 문장이 세상과 어디서 만나고 있는지를 먼저 살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마음이 철렁해서 기자에게 전화를 건다. 다행히 작년부터 올해까지 20편을 연재하는 동안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아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현재 나는 네 권의 책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이번 달에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인도>라는 인도여행시집이 나온다. 델리의 새벽 공기, 조드푸르에서 만난 골목에서 마주친 사람들, 우다이푸르의 넘실거리는 물빛이 시로 응결되었다. 인도 여행은 몇 년 전에 다녀왔지만 내 손에 오래 묵혀두었던 원고이다. 다른 두 권의 원고는 이미 출판사에 넘어갔다. 마지막 한 권은 내년 발간 예정이다. 요즘도 새벽까지 그 원고 수정을 하느라 잠을 설친다. 내 평생에 이런 작업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다 끝나고 나면 얼마나 허탈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글을 쓰는 일은 힘들지만 그 힘듦이 글쓰기 매력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문장을 비스듬히 세워 두었다가 다시 눕히고 단어 하나를 고르기 위해 몇 번을 고친다. 낱말들이 서로를 밀어내다가도 어느 순간 손을 잡는 찰나가 있다. 그 순간을 보겠다고 나는 커피를 식히고 잠을 한편으로 밀쳐둔다. 때로는 진도가 더디고 의심이 커져도 ‘오늘이 지나면 내일의 문장은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나를 붙잡는다. 딸깍하면 원고를 써주는 AI 시대에 내가 하는 일은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보수적인 방법이다.


가장 큰 고비는 박사논문을 쓸 때였다. 그 시절의 나는 몸을 소모하는 법으로 글을 버텼다. 3일 동안 1시간씩만 잠을 자는 날을 세 번이나 겪었다. 해가 뜨고 지는지도 모른 채 문헌의 산을 오르내리며 각주와 도표를 맞췄다. 새벽 다섯 시 화면 속 커서가 깜빡이는 것을 보며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스스로 묻곤 했다. 그때 배운 것은 이론이나 방법론만이 아니었다. 체력이 사유를 지탱한다는 사실, 그리고 지식은 문장에 담기기 전까지는 지식이 아니라는 엄정함이었다.


석사과정의 한 과목에서는 A4 500장에 달하는 보고서를 쓴 적이 있다. 그냥 원고만 쓰는 작업이 아니었다. 당시 20,000권이 넘는 책을 참조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일이다. 그 장대한 문서 속에서 진짜 필요한 문단과 그렇지 않은 문단을 가르는 칼날을 배웠다. 삭제는 배신이 아니라 정리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렇게 버텨 낸 경험은 이후 어떤 원고 앞에서도 두려움 대신 방법을 꺼내게 해 주었다. 장거리 선수가 마라톤을 완주한 후, 더 이상 달리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나 역시 고비를 넘기고 나자 한결 수월해졌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들은 내겐 가장 힘든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실력을 쌓을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체계가 몸에 남았다. 자료를 모을 때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지부터 정하고 초고에서는 속도를 교정에서는 냉정을 챙긴다. 독자를 상상하는 법도 배웠다. 특정한 한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면 문장이 분명해졌다. 그 당시 고통이 있어서인지 요즘 글을 쓰면 잘 읽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제 글쓰기는 직업을 넘어 내 생활의 방식이 되었다. 하루도 글을 쓰지 않고 지내는 날이 없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여행과 글쓰기이다. 기복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글 쓰는 일이 여전히 나는 즐겁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문장을 이끌어와서 세상에 선보이는 일만큼 매력적인 일이 있을까?


잘 쓰는 날과 서툰 날이 교차해도 루틴이 나를 데리고 간다. 마감은 여전히 두렵지만 그 두려움은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처럼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글은 나에게 있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도전이자 설렘의 시작이다. 책 한 권이 완성될 때마다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세상을 향한 시야가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앞으로도 나는 쓰는 사람으로 남겠다. 세계를 해석하는 가장 나다운 방식이 문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주제 앞에서 또다시 헤매더라도 과거의 나를 버티게 했던 법을 믿는다. 언젠가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독자에게 작은 불빛이 되기를 바라며 나는 또 한 줄을 쓴다. 그리고 그 한 줄이 모여 책이 되고 책이 다시 나를 다음 자리로 이끌 것이다. 글은 그렇게 내 삶을 만들고 나는 글로 내 삶을 증명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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