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만난 무로도
해발 2450미터에 위치한 무로도는 일본 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터미널이다. 그 이름만 들어도 설레던 무로도. 어느덧 시간은 5시를 넘고 있었다. 이미 시간이 시간인지라 무로도 터미널에서도 여행객은 거의 없어서 한산한 느낌이었다. 막차가 끊기기 전에 내려가지 않으면 꼼짝없이 산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 그러니 산에 숙소를 정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막차를 타야만 한다. 아무리 6월이라 해도 이 높이에서 아무 장비도 없이 밤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어차피 나는 오늘 산을 내려가지 않는다. 오늘 나는 여기 머물 것이다. 이 산에서.
일본의 알프스에서도 제일 북부에 위치한 히다산맥은 ‘일본의 지붕’이라 불린다. 그중에서도 다테야마(立山)는 일본의 3대 영산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나는 오늘 묵을 숙소인 라이초 산장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누군가의 여행기에서 라이초 산장으로 가는 길을 헤매서 1시간 동안 고생했다는 글을 읽었던지라 바짝 긴장이 되었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산장으로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지만 산에서 해는 장담할 수 없다. 일단 표지판을 믿고 가는 수밖에. 표지판을 따라 가다 보니 처음 묵고자 했던 미쿠리카이센 산장이 나왔다. 지금은 개보수 중이라는 온천이다. 지금부터 여름 시즌까지는 비수기에 해당한다. 그러니 지금이 본격적인 손님을 맞기 전에 시설을 개보수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가 아닐 수 없다.
처음, 무로도 행을 생각했을 때 방수등산화를 신고가야 하나 의문이 계속 들었다. 어떤 이가 눈의 대계곡을 보러 가면서 운동화만도 충분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산에서 나의 최종 목적지는 대계곡이 아니라 산장이다. 결국 무리를 해서 신발을 두 켤레 가져왔는데 그 선택이 이렇게 유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그동안의 여행기에서는 등산로의 눈이 다 녹아 있는 사진만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길은 눈이 거의 녹지 않은 눈밭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그 길을 운동화만 신고 걸었다면 그 결과는 끔찍했을 것이다. 아마 동상에 걸렸을 수도 있다.
산장으로 가는 내내 아까 내렸던 상하이에서 온 부부의 트렁크가 계속 떠올랐다. 만약 그들이 나처럼 라이초 산장에 예약을 했더라면 그 엄청난 크기의 트렁크를 가지고는 도저히 불가능했으리라. 가끔은 불운이 행운일 수도 있다. 지금 그 부부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가는 길은 그동안 여행기에서 보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산길을 내려가다 보니 오른편으로는 미쿠리카이센 호수가 아직도 녹지 않은 채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마도 여름이면 그 장대한 모습을 드러낼 테지만 아쉽게도 눈앞의 호수는 아직 눈과 얼음 천지이다. 얼음에 덮인 채 이제 막 녹기 시작한 호수를 보는 느낌은 각별했다. 가는 도중 운 좋게 뇌조(rock ptarmigan, 雷鳥)를 만난 것도 기분을 좋게 해주었다.
라이초라 불리는 뇌조는 이 지역에서만 사는 조류로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있다. 이곳 사람들은 라이초를 ‘신의 신부름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다테야마 지역의 기념품 가게에서는 뇌조 모형의 인형이나 열쇠고리가 빠지지 않는다. 몇 장 사진을 찍는 사이 눈앞에서 뇌조는 훌쩍 날아올라 계곡 아래쪽으로 훨훨 날아갔다. 새가 날아간 후 긴 침묵이 찾아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서 해가 지는 설산의 모습을 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산은 장엄했고 길게 드리워진 산그늘은 깊어 보였다. 그걸 보고 있노라니 내가 비로소 무로도에 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라이초 산장으로 가는 내내 아무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과연 제대로 가고 있나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상태라 마음 한구석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이런 산에서 길을 헤매는 것과 도시에서 길을 헤매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더군다나 이렇게 2400미터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시간은 해질녁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안감이 더 커져만 갔다. 물론 무로도 터미널에서 라이초 산장까지는 대략 20분에서 30분 정도 걸린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조금 걷다 보니 미쿠리카이센 산장이 나왔다. 숙소를 알아보던 중 산장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할 수 없어서 메일을 보냈더니, 산장 측에서는 응답을 기다리라고 연락이 왔었다. 며칠을 기다리다 3번째 메일을 보냈을 때 담당자는 산장이 7월까지 수리 중이며, 원한다면 다른 곳의 산장을 알아보라는 답장을 보내주었다. 바로 무로도 산장과 라이초 산장이었다. 무로도 산장에서는 만원이라 묵을 수 없다는 답이 왔다. 숙소를 구하지 못해 이리저리 거절당하는 심정이란. 그렇게 해서 부랴부랴 찾은 곳이 바로 라이초 산장이었다.
미쿠리카이센 산장을 지나치고 난 후, 이번에는 제법 가파른 길이 나왔다. 몇 번을 넘어질 뻔하기도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마침내 산장 하나가 나왔다. 에이 설마 여기일까 하고 지나치려는데 표지판이 보였다. 바로 라이초 산장이었다. 왼쪽 아래 계곡에는 지금도 이곳이 화산지대임을 알려주는 유황 연기가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숙소 입구에 들어서니 유황냄새가 확 달려들었다. 어느 글에선가 이 산장에 묵었던 여행객이 유황냄새에 밤새 시달려서 고생했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관계자에게 오전에 전화 통화를 했다고 하자 유쾌하게 방 번호와 산장 안내가 적힌 쪽지를 건넨다. 계산은 내일 아침에 하라는 말과 함께.
2400미터급에서 잠을 자기는 평생 처음이었다. 그동안 백두산, 중국 운남성의 옥룡설산, 베트남 사파의 판시판, 스위스 휘르스트까지 2천과 3천 미터급을 몇 번 다녀오기는 했지만 그건 당일치기였다. 과연 오늘 밤에는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을까? 살짝 긴장이 되었다. 산장은 아늑했지만 난방은 잘 만한 상황인지, 저녁에는 별이 쏟아진다는데 그걸 볼 수 있을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2층에 위치한 내가 묵은 도미토리는 이층침대가 2개로, 총 4명이 쓸 수 있었지만 손님은 나뿐이었다. 라이초 산장에는 다다미 방식의 방과 함께 도미토리도 함께 운영한다. 산장 안내도를 보니 1층은 식당, 지하 1층은 온천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라이초 산장은 총 수용인원만도 320명에 달하는 대형숙박시설이었다. 수용 인원이 수십 명에 불과한 우리나라의 산장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가 아닐 수 없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더 이상 손님이 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자연스레 혼자 독채를 쓰는 느낌이었다. 뿐만 아니라 산장에서 온천까지 즐길 수 있었다. 물론 일본이니까 가능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라이초 산장에서는 바로 산장 아래 계곡에서 끌어올린 천연 온천수와 지하수를 사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침 7시까지 이용 가능한 산장에는 야외 풍경을 즐기면서 온천을 할 수 있는 노천탕 느낌의 근사한 공간이 숨어 있었다. 여기가 아니라면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2400미터에서의 온천욕을.
라이초 산장의 저녁식사는 특별했다. 가장 놀랐던 것은 식사에 회가 나온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 고지대까지 회와 신선한 식재료를 가져와서 조리를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하기야 그 높이에서 식사가 부실하다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여행지에서는 무엇이든 감사해야하지만 특히, 2400미터란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수밖에 없는 높이이다. 하물며 이처럼 편안한 숙소에서 잠까지 잘 수 있다니. 물론 무로도까지 도로가 뚫려 있기는 하지만 그 높이에서 맛보는 신선한 회의 맛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신선한 야채와 나물에서는 손님에 대한 배려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음식맛도 훌륭해서 각종 나물을 비롯해서 음식을 씹는 순간마다 느껴지는 건강한 맛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솔직히 일본을 여행하는 내내 어디에서도 다시는 그만큼 훌륭한 식사를 맛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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