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명색이 여행작가인데 코로나로 발이 묶인 지 벌써 1년이 넘다 보니 슬슬 지치기도 한다. 올해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꽃을 마음에 들이게 된 일이다. 개나리와 진달래, 목련이 환하게 피어있는 주변으로 눈을 돌리기만 해도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다.
그동안 나는 등산을 할 때나 걷기 운동을 할 때 주로 앞만 보고 걸었다. 정해 놓은 목표가 있으니 거기까지 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 다른 이들과 보조를 맞추다 보니 정신없이 걸어야만 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작년에 시민행동 21에서 진행하는 생태해설사 강좌를 들으면서 내 삶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걸으면서 앞이 아닌 옆과 발밑을 보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속도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니 마음에 여유와 평안이 찾아왔다. 발밑을 자세히 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꼼꼼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별꽃, 개불알꽃, 꽃다지 등. 꽃도 꽃이지만 이름도 재미있는 꽃들이 어찌나 많던지. 이름 하나씩을 아는 게 묘한 즐거움을 주었다. 마치 보물 찾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세상이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살았다니, 순간 안타까움과 억울함이 밀려왔다.
평소라면 그냥 무심히 지나쳤을 길도 한참을 보니 거기에 수많은 생명이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예전 같으면 잡초에 불과하다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텐데 이름을 알고 나니 달리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몇 장면이 있다. 그중 첫 번 째는 선유도와 장자도에서 산자고를 만난 일이다. 자애로운 시어머니라는 꽃말을 품고 있는 산자고는 야생화를 좋아하는 이라면 호불호 없이 선호하는 꽃이다.
대각산 산자락에서 처음 산자고를 보았을 때 숨이 턱 막혔다. 햇살 아래 수줍은 듯 모여있는 고고한 자태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평생 처음 본 산자고였지만 그 강렬한 인상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대각산, 선유도, 장자도를 돌면서 올해 보아야 할 산자고는 그날 다 보았다. 이제 또 봄이 지나면 1년을 기다려야 산자고를 만날 수 있다. 야생화는 아무 데나 피지 않고 피어야 할 곳에 핀다. 산자락에서 피는 산자고와 섬에 피는 산자고는 다르다.
그다음은 노루귀와 바람꽃을 보러 갔다. 다행히 이름은 알고 있었고 사진도 보았지만 눈앞에서 하늘거리는 꽃을 보는 일은 또 다르다. 노루귀는 어찌 그리도 색이 처연한지, 보고만 있어도 눈이 어질어질해졌다. 바람꽃은 또 어떤가. 너도바람꽃, 나도바람꽃, 꿩의바람꽃 등 이제는 이름만 들어도 바람에 흔들리는 꽃이 생각난다. 우리가 코로나로 지치고 힘들어할 때도 저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겨우내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날 나는 시민이 생물을 관찰하고 생태지도를 만드는 네이처링에 대해서도 처음 배웠다. 혹시 잘못 올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이름을 모르는 꽃이나 나무를 올리더라도 선배 고수들이 하나씩 친절하게 이름을 알려주었다. 거기에 재미 붙여 하나둘 등록하다 보니 어느덧 내가 올린 자료가 100개에 가까워졌다. 그걸 보고 있으면 적금을 붓는 느낌이 든다.
다음 달부터 매주 토요일에 나비를 보러 무주로 갈 예정이다. 알부터 애벌레의 부화, 나비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나비 생태학교를 신청했기 때문이다. 평소 꽃이나 나무, 나비 이름이 늘 궁금했던 터라 냉큼 신청해버렸다. 연말쯤 내가 사진을 찍고 직접 만든 나비 도감이 나올 걸 상상해보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처음 아는 일도, 처음 해보는 일도 참 많은 해이다. 난생처음 탐사를 따라다니며 야생화를 만나게 된 일,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만난 것도 우연이었다. 좋은 우연 덕분에 나는 자연과 환경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었다. 우리가 사는 일도 그럴 것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일만 하다 보면 새로운 도전이 어렵게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도 세상도 달라지지 않는다. 세상에 생각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때로는 미미해 보이는 작은 시도가 당신의 삶을 커다란 번화로 이끌 수도 있다. 어느덧 겨울이 가고 봄이 성큼 왔다. 이런 날이면 잠깐 눈을 들어 주변을 보면 어떨까. 그리고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발아래 어떤 식물이 말을 걸어오는지 기대해보자. 오늘은 그렇게 하기에 딱 좋은 날이다. 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