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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다
- 나비박사, 석주명

by 산들


나비박사 석주명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은 암울했다. 이미 주권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조선땅 곳곳에 일제 수탈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었다. 그토록 침울하기만 했던 조선에는 다행히도 몇 개의 보석 같은 빛나는 별이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했던 손기정이 그렇고 일본인의 문화재 침탈로부터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지켜낸 간송 전영필도 그 빛나는 별 중의 한 명이었다. 윤봉길과 이봉창,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최전선에서 일제와 맞서 싸웠던 김구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 외 조선과 만주, 그리고 소련 땅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조선의 영웅들이 이 땅을 지키고 다시 회복하고자 몸부림쳤다. 그들이 있었기에 조선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고, 암흑천지 속에서도 ‘광복’이라는 희망을 가슴에 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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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가운데도 그런 이가 있었다. 바로 나비학자로 알려진 석주명((石宙明, 1908~1950)이다. 한낱 개성의 송도고보 생물교사에 불과했던 석주명이 세계적인 학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의 우직함과 함께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던 성실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교사가 아니었다. 그는 뛰어난 학자였으며 조선 나비의 신세계를 개척한 선구자였다. 그 덕분에 한국의 나비가 비로소 정립되었고 오늘날 나비 연구의 본격적인 기틀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철저하게 멸시하고 조선의 문화를 폄하하는 데 집중했다. 이미 일본인은 조선의 지배자로서 군림했고 자신들의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의 기고만장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조선인들은 치욕과 굴욕감을 떨치기 위해 몸부림쳐야만 했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석주명은 나락으로 떨어졌던 조선인의 자긍심을 회복하기 위해 ‘나비’라는 무기로 진검승부를 펼쳤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비라는 실물을 대상으로 한 승부였으며 조선인 누구도 걸어보지 않았던 길이었다.

당시 조선의 나비는 주도하는 일본학자들에 의해 학명이 붙여지거나 검증되는 수준이었다. 철저한 검증이 뒤따르지 못하다 보니 일본학자들은 조선의 나비를 921종까지 만들어놓는 잘못을 범하였다. 동종이명(同種異名, synonym)이 난무하다 보니 학자에 따라서는 동종의 나비를 다른 나비로 분류하여 학명을 붙이는 일이 종종 일어났던 것이다. 나비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의 조선에서 나비를 연구한다는 것은 학자로서 위험천만한 선택이었다. 적어도 당시 조선에서의 나비란 불모지나 다름없었으며 나비 연구 자체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1936년 대표적인 논문 <배추흰나비의 변이 연구>에서 16만 마리가 넘는 나비를 하나하나 분석하였다고 전한다.


“나는 논문 한 줄을 쓰려고 나비 3만 마리를 만졌다.”


그는 이 한 줄의 유명한 말로 자신의 연구를 대변하였다. 나는 이 말을 읽으면서 전율이 느껴졌다. 이 한 줄을 통하여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단 한 줄의 논문을 위해 수만 마리의 나비 날개를 재면서 그는 어땠을까? 어쩌면 그렇게까지 치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수십, 수백 마리만 해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수만 마리라니. 그는 어쩌면 한 줄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 끼니를 거르며 수많은 밤을 불면으로 보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그 한 줄이 천 근 만 근의 무게로 다가온다. 아, 그 처연한 눈부심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그 길에서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마 무슨 말로도 그 상황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어설픈 평가가 불가능할 정도로 지독한 열정이며 무서울 만큼 독한 근성이 아니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남긴 128편의 논문과 8권의 유고집은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도 않고 연구환경이 좋지도 않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한다면 눈부신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과학 선진국이 아니었던 조선의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실로 엄청난 노력과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가 자신의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한국산 나비 250종에 대한 국내 분포도 252장, 세계 분포도 252장을 합한 504장의 나비 지도는 이러한 눈물 어린 결과물이었다.


석주명은 1939년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 지부의 의뢰를 받아 영문 저작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조선산 나비 총목록)을 발간함으로써 세계적인 학자로 발돋움했다. 방대한 표본을 바탕으로 하는 치밀한 결과물은 세계 학자들을 매료시켰으며, 결국 세계 30여 명의 학자만 가입이 가능했던 만국 인시류 학회(萬國鱗翅類 學會)의 회원으로 선출되게 만들었다. 이 뛰어난 성과를 바탕으로 대학에 자리를 잡는 것이 당연했으나 불행히도 그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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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조선산 나비 총목록)



나비학자로서 석주명이 걸어온 길은 철저한 실증과 검증을 바탕으로 자신의 학설을 주장하고 논리를 설파하는 길이었다. 그의 논문은 책상에서 그냥 써진 게 아니었다. 전국의 나비를 채집하기 위해 그만큼 무수한 발품을 팔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돌아다닌 곳을 지도에 표시한다면 꽤 복잡할 것이다. 나는 100만 분의 1 지도에 내가 다닌 길을 붉은 선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거의 거미집 모양이 되어가고 있다. 나비 종류 수대로 빨간 선의 거미집이 완성되면 이 나비 분포지도를 보고 채집지를 택하여 여행을 떠나게 될 거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열악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환경을 이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전국에서 수업을 받고자 왔던 제자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있었다. 그들은 전국에서 나비 표본을 수집함으로써 스승이 놀라운 성과를 이룰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뛰어난 업적 중의 하나는 나비에게 우리말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각시멧노랑나비, 무늬박이제비나비, 은점어리표범나비, 청띠신선나비, 번개오색나비 등등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순수한 우리말 나비 이름의 70% 이상은 석주명이 지은 이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우리에게 얼마나 귀중한 선물을 선사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전쟁 중에 벌어진 그의 죽음은 실로 허망하기 짝이 없는 비극이었다. 전쟁통의 비극이었다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이었다. 석주명, 그는 조선인으로서는 아무도 가보지 못했던 길을 걸어갔다. 전 세계가 주목할 만한 평생의 역작을 남기고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학자로서 걸어갔던 그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이었을지, 그리고 얼마나 고독했을지 어렴풋하게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우리 학계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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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접류(蝶類)분포도



평생 나비만 바라보며 살았던 석주명.

그가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꿈꾸었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미처 끝내지 못했던 『한국산접류(蝶類)분포도』였을까? 아니면 나비를 채집하던 황홀했던 그 순간이었을까 궁금해진다. 나비만을 바라며 평생을 살았으니 어쩌면 그는 지금도 나비와 함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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