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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기억이 내게로 온다

by 산들

한 장의 사진이 내게 올 때

만약 당신의 눈앞에 한 장의 사진이 있다면 무슨 사진일까? 어떤 이는 가족사진을, 어떤 이는 연인의 사진을 떠올릴 수도 있다. 흔히 인상적인 장면을 회상할 때, 우리는 그때 일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는 표현을 쓴다. 이처럼 사진은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아두는 매력적인 힘과 특별한 마력이 있다.

당신은 그동안 수많은 사진을 찍고 또 보면서 인생을 살았다. 그중에는 당신의 눈길을 사로잡는 사진도 있고 평범한 사진도 있었을 것이다. 혹시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어떤 사진이 기억나는가?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어렴풋하게라도 마음속에 품고 살았던 사진 한 장쯤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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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 사건을 다룬 당시 신문


때로는 사진 한 장이 수백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4.19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던 사진이 있다. 바로 김주열 열사의 사진이다. 최루탄이 오른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처참하게 발견된 열사의 사진 한 장은 이 신문 기사를 본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혁명에 관심없던 사람들에게조차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도화선이자 강력한 저항으로 가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우리 주변에는 이처럼 역사를 움직인 사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흔히 말하는 인생 사진이 한 장쯤은 있을 것이다. 사진이 없다 할지라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한 장면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는 인생 사진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매력적인 사진이 인기이다. 굳이 사진 기술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세상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에 자신의 내밀한 삶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사진으로 넘쳐난다. 자신의 일상생활을 담담하게 기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홍보용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비난을 무릅쓰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독창적인 사진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한다.


그러나 한 장의 사진은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사진을 찍는 순간, 그는 자신의 열정과 의지를 바쳐 초집중 상태에 빠져버린다. 그는 숨을 멈추고 세상에서 가장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전사의 심정으로 대상 앞에 나선다. 자연에서 꽃을 만날 때도 그러하다. 마치 수줍은 고백을 들은 것처럼 그제야 꽃은 비로소 제가 가지고 있는 선명한 자태를 보여준다. 그 순간만큼은 마치 꽃이 상대방의 진심을 이해했으므로 자신의 숨겨진 자태를 기꺼이 보여주겠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다. 어떤 사진에는 단 한 장의 사진이면 족하겠다는 간절함, 사진 한 장에 목숨을 걸어도 좋다는 절박함이 묻어난다. 가끔 지금이 아니면 이 순간을 포착할 수 없으니 사진 한 장에 시간과 공간을 압축해서 담아내겠다는 의지가 드러나는 사진도 있다. 그냥 눈으로 보는 꽃과 카메라를 통해 담아내는 꽃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한 번은 아는 이와 여름 지리산 노고단을 간 적이 있다. 어느 순간에 그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당황한 나는 주변을 찾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나는 풀숲 근처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한참을 지켜봐도 그 자세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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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쓰러지지나 않았을까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 자세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점차 시간이 길어지면서 혹시 기도를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자세가 수상했다. 만약 쓰러졌더라면 모로 기울어진 모습이었을 텐데 그는 그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아니었다. 지나가던 등산객 두 명도 가까이 와서 걱정 어린 시선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는 쓰러진 것도 그렇다고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간 내 눈에 보인 건 집중해서 사진을 찍고 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아마 야생화였던 걸로 기억한다. 비록 그 사진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 각도가 아니면 도저히 찍을 수 없는 사진이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땅바닥에 고개를 조아리고 사진을 찍도록 만든 것이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그날 찍은 사진 중 최고 사진이 아니었을까?

꽃이나 식물이 정적인 상태라는 점에서 사진 찍는 이에게는 그나마 형편이 낫다면 나비나 새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대상은 좀 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까칠한 나비나 새는 사진 찍는 사람의 처지는 아랑곳없이 사방으로 움직여댄다.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사진 찍는 이의 인내심도 어느새 바닥이 나고 만다. 그 시간차를 줄이기 위해 카메라 연사를 고집하는 이도 있다. 마치 기관총처럼 수십 장을 한 방에 찍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옆에 선 내가 초라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 부럽기도 한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그중에 한 장이라도 건지면 만족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만나는 한 장의 사진에는 그 꽃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 그의 마음, 그의 열정과 시간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비록 눈앞에서 꽃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찍은 사진에는 세상에 그 아름다움을 전달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그대로 전달된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사진을 찍은 이와 사진을 보는 나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거리 같은 게 어느 순간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나는 어쩌면 그도 사진을 찍으며 내 마음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에 빠지기도 한다.


언젠가 누군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배를 타고 섬에 도착해서 한참 물속을 걸어간 후 촬영 조건이 맞을 때까지 다시 몇 시간을 기다렸다는 말이었다. 그냥 말만 들었더라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처음 사진을 보았을 때도 범상치 않았지만 그 말을 들은 이후 본 사진은 더 각별했다. 사진이 말을 걸어온다는 말이 있지만 그 사진도 무언가 나에게 말을 건네는 느낌이었다. 사진에 대해 잘 모르는 나조차 이런 생각이 들 정도이니 직접 사진을 찍었던 사람이라면 사진을 볼 때마다 얼마나 만감이 교차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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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환성리



아마도 그는 마음에 드는 이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수십,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그 사진 가운데 고르고 골라서 이 사진을 택했을 것이다. 그가 찍었던 사진들 가운에 선택받은 사진과 그렇지 못한 사진 사이에는 미세한 차이만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차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선택의 길에서 그는 또 얼마나 많이 방황했을 것인가. 그 많은 사진 중에 빛의 선택을 받고 명암이 빚어내는 신비한 힘에 의해 만들어진 사진만이 최종적으로 선택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사진을 보면서 한없이 감탄하고 무수히 절망하고 때로 환호하고 마침내 감사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도도한 사람이라도 사진을 위해 꽃과 눈을 맞추려면 몸의 자세를 한껏 낮추어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앉아서 되는 문제만은 아니다. 일단 쪼그리고 앉지만 그 자세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결국 이어지는 그다음 동작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것이다. 그제야 조금은 정서적으로 안정된 느낌이 들고 편안해진다. 물론 장시간 앉아 있으면 일어설 때 순간적으로 어지러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다. 일단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멋진 구도의 사진을 만드는 일이다. 이렇게 몇 번을 하다 보면 땅바닥으로 향하는 일이 고통스러워진다. 두 번 다시 앉지 않겠다는 말을 몇 번씩이나 하고도 마음에 드는 대상을 보면 다시 땅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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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인생 사진을 얻고자 한다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거나 엎드리는 일조차 기꺼이 감수한다. 그는 한껏 불편한 자세에서 숨을 참고 초집중한 상태에서 사진을 촬영한다. 꽃이 바람에 흔들리면 그의 마음도 마구 흔들린다. 물론 기계적으로 셔터 스피드를 빠르게 조절해서 촬영할 수 있지만 그는 피사체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지우고 흐르는 시간까지 정지시키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낀다. 오로지 대상과 독대할 수 있는 상태에서 둘 사이에 흐르는 시간의 정지를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이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 평화롭고 은혜로운 시간을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들이 열정이 부럽다. 세상의 시선쯤이야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향해 몰입하는 행동이 눈부시다. 그 순간 그는 대상과 뜨거운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누구라도 그 순간만큼은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랑을 섣불리 따라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누가 함부로 탓할 수 있으랴. 하지만 가끔 이런 행동이 과할 때가 있다. 한 번은 강원도 홍천에 가서 나비 사진을 찍던 중 누군가가 예고도 없이 내 눈앞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더니 이어 안하무인으로 옆사람을 밀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오직 사진만 찍어야겠다는 생각만 있을 뿐, 다른 사람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눈치였다. 미안하다는 말은 물론 잘라먹었다. 서둘러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하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정말이지 이런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이거나 무조건 사양하고 싶다. 당연히 그가 찍은 사진은 볼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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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얼마나 그럴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자연과 만나는 일은 늘 설레고 두렵다. 앞으로 내 인생 사진이라 할 수 있는 사진을 찍을 일이 얼마나 있을까. 자연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세상을 나에게 열어 보여줄 때, 나는 어떤 마음으로 그 앞에 나설까? 부디 교만하지 않기를, 그리고 욕심으로 내게 주어진 그 소중한 시간을 망치지 않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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