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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꽃, 산자고

by 산들


생전 처음으로 식물을 공부하면서 막막하기만 했다. 이름을 들어도 외워지지 않고 들어도 돌아서면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명색이 박사인데 식물에 관해서는 완전 초보이다 보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왜 이리 꽃이나 식물 이름은 외워지지 않던지. 꽃이나 나무 이름을 척척 말하는 이를 만나면 우선 주눅부터 들었다. 그들의 삶 가운데 차지한 시간이 얼마인지 먼저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은 생각하지도 않고 부러움이 앞을 가렸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때 결정을 한다. 계속할 건지, 아니면 포기할 건지. 그때 같이 저녁마다 수업을 들었던 이들을 지금은 만날 수 없는 것은 그 선택의 결과인 셈이다. 식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아내의 권유로 ‘시민행동 21 꽃다지’라는 단체에서 진행한 ‘생태해설사’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스무 명 남짓한 참가자들이 밤마다 식물을 공부하기 위해 참가했다. 매주 밤마다 만나서 식물을 공부하다 보니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주말에는 전주수목원에 가서 해설을 들으며 눈이 호강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전주에서 가까운 전주수목원에 그렇게 많은 식물과 나무들이 숨어 있는지 까맣게 몰랐다. 계수나무 잎이 시간이 지나면서 솜사탕 냄새를 풍긴다는 사실도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평생 처음으로 혼자 시간을 내서 수목원을 찾기도 했다. 아침에 전주수목원을 갔다가 오후에 대아수목원으로 발길을 옮기기도 했다. 가끔 꽃다지에서 하는 위해식물 제거 작업에도 참가했다. 뭔가 해보려고 노력은 끊임없이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은 없었다. 조금씩 무력감이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다. 그때 꽃다지에서 식물 탐사 이야기가 나왔다. 고군산 일원으로 산자고를 보러 간다는 것이었다.


산자고라는 이름도 그때 처음 들었다. 산자고, 처음 느낌은 이름 치고는 특이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름이 쉽게 외워지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탐사 장소가 고군산이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육지에서 나고 자란 나는 고군산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먼저 설렌다. 예나 지금이나 푸른 바다를 보기만 하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섬에도 꽃이 있다니, 이 얼마나 신기하고 설레는 일인가.


마침내 탐사 날, 대책 없이 무작정 차를 얻어 타고 따라나섰다. 좋은 말로는 마음을 비웠다고 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먼저 도착한 곳은 군산 대각산. 산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산을 타고 오르다 보니 언뜻 눈에 들어오는 꽃이 있다. 산뜻한 하얀 바탕에 선연한 붉은 줄무늬. 탄성이 절로 나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는 핸드폰을 꺼내 꽃을 찍기 시작했다. 우리는 화면으로 그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담기 위해 사방으로 돌아가며 몸부림쳤다. 산자고 한 송이도 감당하기 버거운데 무더기로 그 사랑이 다가왔다. 눈부신 꽃 산자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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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각산 자락에서 만난 산자고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고군산군도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우리 말고도 이미 다른 일행이 있었다. 탁 트인 파란 바다가 내 눈에 들어왔다. 바다를 굽어보는 곳에 산자고가 군데군데 군락으로 피어 있었다. 앞서 찾은 이들 중 누군가가 사진을 찍다가 흥분했는지 현장은 처참했다. 정갈하게 피어있는 산자고와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발자국, 결코 같이 공존해서는 안 되는 두 장면이 거기에 있었다. 아마도 사진에 정신이 팔린 누군가가 발아래를 제대로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꺾인 산자고 몇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아려왔다. 한편으로는 이래서 사진 찍는 사람들이 욕을 얻어먹나 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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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람이 불 때마다 산자고가 부드럽게 출렁였다. 눈부신 햇살을 머금고 있는 산자고는 천상의 꽃과 다르지 않았다. 대각산의 산자고도 좋았지만 바다를 배경으로 기품을 자랑하는 산자고는 더 일품이었다. 멀리 파란 바다가 배경처럼 그 춤사위를 받아주고 있었다. 꽃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내 마음도 덩달아 출렁거렸다. 아마 가수를 좋아하는 팬클럽의 심정이 이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카메라를 든 이가

무릎을 굽히는 순간

여린 산자고 몇이 넘어졌다


바다를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찍겠다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못 피한 산자고 몇이 숨졌다


그가 떠난 자리에

다른 이가 다시 찾아 들고

간신히 살아남은 산자고 몇이 사라졌다


그의 빛나는 사진에

사람들이 탄식하는 순간

남은 산자고 몇이 울먹였다


그들이 다른 꽃에 정신 팔린 순간

산자고는 지치지도 않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또 웃었다

- 산자고의 비명


그렇게 바위 자락에 핀 산자고를 사진으로 담으면서 그 영롱하고 눈부신 자태에 정신이 팔려버렸다. 조금만 더 용기를 내서 아래 바위로 내려간다면 더 좋은 사진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욕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순간 마음을 다잡았다. 아, 이래서 사진을 찍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쳐갔다. 산자고에 얽힌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그다음 일이다. 나는 그날 내 평생에 보아야 할 산자고를 다 보아버린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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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운 좋게도 산자고를 몇 차례 더 만날 기회가 있었다. 첫인상이 강렬해서인지 산자고를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여전히 산자고는 아름다웠고, 어디서든지 그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산자고도 그때 고군산에서의 감동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고군산에서 처음 만났던 산자고의 느낌을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날 이후 산자고는 평생 굳게 닫혀 있던 자연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산자고는 내 인생의 첫 번째 꽃으로 남았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작년 봄날 어느 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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