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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나무가, 생명이 내게로 왔다

by 산들


내가 자연으로 향하는 이유

올해 숲으로 향하는 일이 많아졌다. 평생 동안 다닌 것보다 올해 가본 산이 더 많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요즘 들어 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잦다. 어떤 때는 식물을 탐사하는 팀을 따라서 어느 때는 나비를 좋아하는 이를 따라서 향한 게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평창군 어론리, 경북 의성, 지리산 노고단, 무주 덕유산, 경기도 화악산, 울릉도 성인봉, 제주도 한라산 등이다. 어느 날은 강원도로, 어느 날은 울릉도로, 어느 날은 제주도로 동선이 향하다 보니 내가 진짜 홍길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바삐 일정을 잡는 것은 한편으로 지금 다니지 못하면 언제 가겠냐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코로나 이후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물론 예전에도 국내와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기는 했었다. 하지만 작년 내내 사무실을 벗어나지 않고 글만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연이 많이 그리웠나 보다. 이전의 삶이 사무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이었다면 지금은 일단 떠나고 보자는 마음이 우선한다. 당장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하고 싶거나 가고 싶은 곳은 체력이 허락하는 한 해보자는 주의로 바뀐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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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목표를 정하고 가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그냥 마음을 비우고 간다. 애써 시간을 맞추고 가더라도 어느 때는 목표로 하고 가더라도 꽃이 피지 않았을 때가 있고 나비를 보지 못하고 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자연이다. 욕심을 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건 일찍이 깨달았다. 비록 목표한 꽃이나 나비는 보지 못하고 오더라도 속상하거나 나빴던 적은 없다. 항상 생각하고 갔던 이상으로 매번 큰 기쁨을 얻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다녀올 때마다 실감한다. 앞으로도 내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내 짧은 지혜와 경험으로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꽃을 마음에 들이는 일

식물 탐사는 다니는 이 가운데도 꽃에 관심이 많은 이가 있고 나무에 관심이 많은 이도 있다. 꽃을 좋아하는 이들은 기나긴 겨울을 이기고 봄꽃이 피기 시작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이라도 온 것처럼 흥분한다. 겨우내 삭막하기만 했던 겨우내 움츠리고 있다가 봄이 되어 눈만 돌려도 온갖 꽃이 피니 얼마나 좋겠는가. 그들에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것은 겨울의 시작이나 다름없다.


꽃을 보지 못하니 밑천이 떨어져 이야깃거리도 줄어든다. 당연히 말수도 줄어든다. 가끔 지난 사진을 보며 위안을 삼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 둘 남쪽으로부터 꽃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하면 그들의 심장은 요동치며 발걸음은 빨라진다. 그들은 봄이면 마치 새로운 연애에 빠진 것처럼 꽃을 볼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나무가 묵은 빗장을 풀고 새순을 세상에 보내듯, 그들은 한동안 잊고 있던 꽃을 향한 마음을 꺼내 들고 봄을 맞을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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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혹은 아는 사람들과 매주 야외 탐사 일정을 잡고 마음에 둔 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다. 꽃이 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다리느라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흡사 연애에 빠진 모습과 닮아 있다. 다만 대상이 다를 뿐이다. 꽃에 주로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불붙는 연애가 시들 해지 듯 봄과 여름, 꽃이 사라지는 시기를 기점으로 관심이 확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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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우연히 남도에서 바람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때마침 주말이어서 아내와 함께 남도행을 계획했다. 서두른다고 해도 새벽에 떠나지 않는 한 아침 시간대는 훌쩍 간다. 어찌어찌해서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오전을 훌쩍 넘긴 오후 시간대였다. 게다가 비까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화엄사 홍매가 좋다는 소식은 이미 뉴스에서 들은 터였다. 우리는 급하게 일정을 수정했다. 오랜만에 찾은 산사는 고즈넉한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제법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화엄사의 자랑이라는 홍매화 부근에는 이미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음직한 이들이 제법 있었다. 일반인들도 홍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부산했다.


처마에서 비를 피하다 보니 홍매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모든 걸 꼭 가까이에서만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감동을 줄 때가 있다. 나는 그저 한참을 넋을 잃고 흠뻑 비를 받아들이는 홍매를 바라보았다. 그 풍경을 보는 순간, 그동안 아등바등 대며 살았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만 듣고 있다 보니 힐링도 이런 힐링이 없다. 처마에 떨어지는 빗소리야말로 세상에 둘도 없는 교향악이자 하모니였다.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는 차 한 잔이 절실했지만 모든 걸 누릴 수는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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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 구경을 마치고 보니 빗발은 어느새 아까보다 더 굵어져 있었다. 급하게 내려오다가 그동안 못 보던 꽃을 보았다. 우산 사이로 산뜻한 꽃이 눈에 쏘옥 들어왔다. 바로 개별꽃. 비에 젖은 개별꽃이 그렇게 예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정신없이 사진에 담기는 했으나 그 감동까지는 마저 담지 못했다.


처음에 남도로 향할 때는 바람꽃을 보러 갔으나 화엄사 홍매에 흠뻑 취했고, 더불어 기대치 않았던 개별꽃까지 볼 수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처음 목적했던 바람꽃에 대한 아쉬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보고 싶었던 홍매에 개별꽃까지 한 마디로 횡재한 느낌이었다. 비가 와서 더 근사했던 하루였다. 아내와 나는 그날, 마음속 한편에 근사한 홍매화를 심지 않았을까. 그 옆에 이슬 머금은 개별꽃도.


자연에서는 때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런 상황이 더 멋진 추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매번 기대 이상의 선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게 함박꽃이나 까치박달나무일 수도 있고, 때로는 우연히 만난 하늘소나 방패광대노린재일지도 모른다. 아마 이것이 우리가 숲으로 향하는 발길을 멈추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신은 이렇듯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곳에서 뜻밖의 선물을 준비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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