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에세이
오늘도 나는 걱정을 말해버렸다. 나도 걱정을 받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안다. 가끔 타인에게 걱정을 받으면 누구나 기쁘고 감동받는다.
하지만 그 걱정을 수시로 들으면, 그건 걱정이 아니라 간섭과 불신으로 느껴진다. 코로나19 시대에 접어든 지 두 달이 넘었다. 일상은 걱정으로 가득하다.
어떤 사람들은 불안해서 걱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불안해서 걱정하고 또 걱정한다.
나는, 불안해서 걱정을 계속하는 사람이다.
한국은 아직 외출이 가능하다. 벚꽃이 피었고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산책을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정도의 일상이 언제까지 가능할까, 생각한다.
외국에서 통제 불가능한 상황들이 펼쳐져 부족한 산소호흡기를 놓고 삶과 죽음을 판단한다는 기사를 떠올린다.
누군가를 살리고 그 대가로 누군가를 포기하겠다는 결정. 나와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포기되지 않을 수 있을까?
30대가 되기까지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아끼는 사람들을 허망하게 보내며 살아왔다. 죽음은 허망하다. 죽음 자체가 허망하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는 살면서 중요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다는 게 허망하다. 그렇다고 죽음의 허망함에 아무것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살 수도 없다. 그게 죽음과 뭐가 다를까?
코로나19가 시작되고 일상이 멈추었다고 했지만, 사실 일상은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코로나19를 짊어지고 새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도 그렇다. 생각해보면 일상은 언제나 죽음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일이었다.
코로나19 이전에도 각자도생이 시대정신이라고들 했다. 사람은 제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고들 한다. 정말 그런가? 내가 아끼는 사람이 없다면 죽음을 짊어지고 일상을 살아갈 원동력이 있을까? 나는 네가 있어야 일상을 살아갈 힘이 생긴다. 그러니 결국 내가 아끼는 사람을 걱정하는 건, 나를 위한 걱정이다.
내 걱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 이 새로운 일상에서 나의 목표가 됐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쉽다. 내 일상을 살아가는 것. 내 일상에서 좋고 즐거운 것들을 찾아내 불안 속에 지워지지 않게 노력하는 것. 내 마음을 돌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전문가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
불안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질 때가 있지 않은가.
불안은 놀랍게도 존재를 외면할 때보다,
인정했을 때 더 가벼워진다.
잘 들어주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에게
도움받기를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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